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18”
아직도 ‘주의 종’이라는 말을 무슨 ‘특 대 무당’ 정도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한때는 교회 안에서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뭔가 못된 짓을 꾸미다 내게 딱 걸리면, 다음 주일예배 대표기도 때 유난히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꼭 그렇게 호칭하던 장로도 있었다. “오늘도 ‘주의 종님’을 강단에 세우셨사오니...” 내참, 마을에서는 자신이 목사 월급 주는 거라고 광고하면서. 이후에 <변경된 새로운 기독교 용어>라는 책자도 총회에서 발간되어 몇 번을 이야기했다. “‘종님’이 뭡니까? 사실 ‘종놈’이지요. 성서 본문대로 그냥 ‘주님의 종을 통하여...’ 라고 하시죠?”
하기야 언젠가 “우리가 왜 ‘종(從)이냐?”고 항변하는 이웃 목사도 있었지만, 바울 같은 사도들은 그렇지 않았다. 절대 신분사회에서 스스로 누군가의 ‘종(δουλος)’이라고 기꺼이 자신을 소개하는 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자신의 ‘주인(κυριος)’에 대한 극진한 존숭과 경외심에서 나오는 충정의 마음이 자부심으로 넘치는 종이라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겨울 부흥회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다고 서원하라!’고 연일 외치는 강사 목사님의 설교에 몰입되어 그만 “제가 주님의 종이 되겠습니다.” 라며 뜨거운 눈물로 약속해 버렸다. 1년 뒤 유난히 목소리가 카랑카랑하셨던 고영근 목사님의 부흥회에서 그것은 완전히 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았고. 다시 1년 뒤 중학생으로 친형제나 다름없던 동무네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강사 목사님은 매우 열렬히 설교하다 말고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마친 다음에 바로 가지 말고 사택에서 기다리거라!” 하셨다.
냉기 가득한 사택 건넛방 목사님의 숙소, 땀에 흠씬 젖은 양복 윗도리를 팔에 걸치고는 다 해져서 두툼해지고 붉은색이 허옇게 바랜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들어온 목사님은, 한 손은 내 까까머리 위에 또 한 손은 무릎 꿇은 등에 올리고는 가슴이 쿵쿵 울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간곡히 간곡히 기도하셨다. “택하신 어린 주의 종이 죽도록 즐거이 복종하며 살게 하옵시고, 환란과 고난에도 주님만 위해 이 사명 감당케 하옵소서...”
반 시간을 훌쩍 넘긴 기도였지만 발 저린 줄도 모르고 그냥 엉엉 울고 있던 나는 당시 불과 열네 살이었다.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마루에 권사님들 서넛이 함께 기도하시다가 이렇게 말했다. “주의 종 났다~!” 그날 나는 예배당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혼자 새벽을 맞았었다.
그 뒤로 나는 정말, ‘주님의 종’들은 전부 그렇게 따로 태어나는 건 줄 알았다. 그리고 바울이 편지에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자신을 이야기하는 걸 볼 때마다 이후 50년 가까이 사는 나는 지금도 목이 멘다. 후회와 탄식뿐이지만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바울의 길을 제대로 걸어야 하는데. (고전 11:1, 4:16, 빌 3:17)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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