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도대체 목사는 무엇으로 목사인 걸까? 남보다 오랜 기간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나이 많아 어렵사리 신대원을 졸업하고 뒤늦게 목사가 된 이들 중에는 목사로 안수받은 뒤 유별나게 태도나 목소리까지 돌변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만큼 전도사로서 목사들에게 차별을 겪은 설움 때문일 것이고, 교회 안에서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계급으로 떠받드는 웃기는 풍토 때문일 것이다.
오직 주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맡은 직분이 다른 ‘신앙의 동료’일 뿐인 건데. 보통의 교인들보다도 한참 부족한 인격에 여전히 성화 되지 못한 인성을 가지고 감히 목사가 되는 것인데. 교인들과 달리 일평생 목사라는 십자가 아래 짓눌려 살지 않으면 구원의 자리에 서기 어려우니 묶어놓으신 걸 텐데.
이런 일을 특히 엄중히 여겼던 종교개혁 시대의 개혁주의교회(장로회교회) 목사들은 스스로 ‘노예나 죄인의 목에 채웠던 착고(着庫)’를 상징하는 불편한 셔츠를 입고 일평생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과 교회의 종으로 살았던 건데.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님께서 우리 모두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합니다.”(고후 4:5)
그런데 과연 요즘 시대에 그런 목사의 직을 자신의 십자가로 지고 막중한 스트레스 속에 사는 목회자, 그런 심리적 중압감으로 건강을 상하며 사는 그런 목사가 몇이나 될까? 일종의 천형(天刑)과 같은 그런 삶을 자신의 숙명으로 불러주신 분께 순명(順命)을 바치려고 다만 공부에 전념하는 신학도가 몇이나 될까?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피하지 않던 바울을 흠모하는 이 몇이나 될까?
중고등학생 아이 하나를 무릎 꿇려 앉혀놓고 그리도 진지하고 안타깝게 가르치시던 어르신 목사님들이 이제는 사라진 시대이다. 신학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우리는 ‘목회 실습’ 과목을 이수해야 했다. 지금은 소천하신 고 박종렬 목사님이 가르치셨는데 목사님은 그 특유의 낮고 쉰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여러분은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목사를 신용하지 않는 시대, 목사들도 신실함보다 이익을 추구하는 시대, 그런 시대를 혼자서 변치 않고 끝내 살아야만 하는 ‘산 순교’의 시대입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것들을 동료 후배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오늘 우리의 시대는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많이 좀 더 강조해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절실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무엇으로 목사인가? ‘그리스도님의 남은 고난’ 곧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세워내는 일에 진력하는 일로 목사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주님의 몸’을 목사 자신들의 출세와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세태가 되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심기일전하고, 다시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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