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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신의'와 '의리'?

by 농민만세 2013. 10. 23.

'신의'와 '의리'?

김장배추 속이나 들어 차도록 단비나 좀 흠뻑 뿌려 주었으면 싶을 만큼이나 한편 야속하도록 좋은 가을 날씨입니다.

다들 평안하시죠?

요즘 공연히 이 두 낱말이 자꾸 생각 납니다. 그냥 쉽게 넘기면 될 것을 자꾸만 깊이 생각하니 점점 더 복잡해 지는 거 같습니다.

'信義'와 '義理'

좀 쉽고 분명하게 이 두 낱말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이렇게 써 놓고 반복해서 읽어보니 한편 '의리'보다는 '신의'가 더 넓은 뜻을 가진 말인 거 같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신의'는 '믿음과 의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 하고, '의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나옵니다.

'의리'라는 말의 뜻이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좋은 뜻이었나 싶어 조금 낯설기까지 합니다.

그 아래의 설명을 더 보니 두 번째 뜻이 하나 더 나옵니다. '남남끼리 혈족 관계를 맺는 일.' 아하, 그래서 이 말을 주로 깍두기-어깨 분들이 즐겨 쓰는 말이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이 첫 번째 뜻과 두 번째 뜻은 서로 충돌하는 느낌도 듭니다.

남남끼리 혈족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아닌 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까지라도 저버릴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의리가 있다'는 말로 보통 사용하니 말입니다.

이제야 좀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남남끼리라도 혈족 관계를 맺는 일이 그 당사자들에게는 정말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외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정작 그것은 의리가 아니라는 것이구나 싶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외의 이웃에게 설령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에 현저히 부족하거나 모자라는 것이라면, 그런 일에도 쓰면 안 되는 낱말이겠다 싶습니다.

그리고 '의리'는 보다 좁은 인간 관계 안에서도 쓸 수 있는 말이지만, '신의'는 그렇게 좋은 의미의 '의리'에 '믿음'이라는 개념이 함께 하는 말이므로 보다 넓은 사회적 관계에서 쓸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이란 상호 동등한 책임이 있는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통용되는 어떤 사회적 약속일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최소한 이런 사회적 약속 자체가 일종의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이 아마 우리의 양식있는 시민 사회일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이 '신의'야말로 '의리'를 뛰어 넘는, 그런 사회적 인격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남남이면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종류의 사회를 지탱해 주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 책상머리 얘기가 되고 마니 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아주 낮은 저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리를 하고 밑줄을 그어 봅니다.

그저 최소한이라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신의 자취에 대해 최소한 혼자라도 부끄러워라도 하기.


그런데 이것도 너무 거창해 보입니다.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그저 최소한이라도,

내가 어부지리로 얻은 것에 대해 대놓고 표리부동만은 하지 않기!

실은,

어제 오후, 왁자지껄 하교 길에 교회당에 몰려든 초딩 황자(皇子)눔들이 그나마 스마트폰을 손에서 잠시라도 놓는 놀이가 뭘까 고민하다가 사다 놓은 몇 가지 보드게임을 시켰는 데요,

하, 쌈하듯 몹시 치열해져서 시끄럽기에 내다보니 바로 그런 '최소한의 신의도 없는 눔' 하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야, 人馬. 그래도 그럼 안 되지, 엉!? 양보한 친구 꺼까지 다 먹으려고 혀? 그건 아니지, 안 그려?! 너 그러다가 친구들 다 잃어버리는 겨~"

그러다가 아차 하면 울고 갈 기세여서 컵라면 하나씩 부어 먹이고 보내려는 데, 어라? 결국은 혼자 심통 다 부리고, 먹던 컵라면을 그대로 싱크대에 쏟아버리고는 자기가 가장 억울한 피해자라고 되레 식식거리며 교회당 문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에구, 사람살이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정함을 선택하고 신의를 실천한다는 것, 정말이지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정말이지 이건 오직 우리 주님 같으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절실해 집니다.

Κυριε, ελεησον 'ηαμας !
'퀴리에, 엘리이손 헤마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글을 맺으려다가, 그만 아차~! 싶습니다.

혹시라도 정말 대놓고, 그 무엇이든 누군가의 양보나 희생으로 얻은 것을 나도 모르게 정말 혹시라도 대놓고 표리부동하고 살아온 게 있는 거 아닌가?

실은 어제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정말 별 생각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뜨끔!하였습니다. 아주 난감한 일이 생각이 났으니 말입니다. 어떤 이의 말처럼 '묵언의 미학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데, 이 난감한 처지를 어찌합니까.

틈만 났다하면 비집고 나오는 이 웃기는 자만과 자기기만을 어찌할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 지난한 '맏아드님 닮는 길'(롬 8:29)이 그저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이런 글조차도 또 하나의 자만이요 기만이겠지요.

자꾸 연세가 드시고 허리가 굽으실수록 모든 걸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 어머니를 요즘 잠시 좀 모시고 살다보니 그래도 확실히 전보다는 선한 마음 착한 심정을 조금은 더 갖게 되는 건가 봅니다~

요즘, 우리 노회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다들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