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고마운 게
사느라 벅차
이런 저런 걸
좀 깊이 독서하며
길 찾아가지 않아도
그럴 시간이 없어도
이렇게 참고할만한
도움이 많으니
고마운 세상 ㅋ,ㅋ
인간이란,,,
"엔트로피에 저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그 전쟁 멈추고 평화로이
이 거대한
우주의 엔트로피에
저항을 멈추는 것
비로소 멈춰도 되는
실로 그런
은총을 입는 것
눈물 겹게 고마운
요즘 주야 교대로
일하는 직장에서
무지 많은 걸
매일 배우고 본다
특히, 아마도
우리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어마어마한
엔트로피 저항이
매일 매일 매일 매일
일어나고 있는 현장
와오~@,@V
한나 아렌트가
노동과 작업을 분리
이야기한 이유가,
뭣보다도
노동의 가치니 뭐니
닥치고
인간의 벅찬 모든 노동은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정의롭다,,,
(갈릴리 목수를 보라)
일하며 글쓰기가
가능해지면 좋으련만ㅜ,ㅜ
아오ㅡ,ㅡ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사시다가 작년에
그 평화를 입으신
주국영 장로님께서
남겨 주신 책을
책상 위에 꺼내 놓다
왜 좋으신 분들은 늘
그리도 빨리 가시는지
장로님 소천 후
권사님과 우리는
정말 많은 걸 끝내
아쉬워 하고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엔
슬픔이 남아 있다 ㅡ,ㅡ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3790224911051118&id=100001909395797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1980(1991 최초 번역)
에너지 전문가 그룹에서 리프킨 이야기를 하면,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한 이야기만 한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듯 싶다. 에너지 전문가 그룹을 넘어 Input/Output, Process, Efficiency, Feasibility 등을 따지는 공학, 엔지니어링 분야 사람들도 가방끈과 경험치가 길수록 그렇게 볼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추상에서 오는 메타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메타포가 모든 이치를 통달한 현자의 것(특히, 해당 분야의)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메타포에 영감을 얻거나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프킨이 에너지 산업 변화, 에너지 전환, 그린 뉴딜에 미치는 영향은 부정보다 긍정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아주 오랜만에 엔트로피를 다시 열어봤다. 이 책의 발간 시점이 1980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좀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 그의 상상과 추상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추상 혹은 밑그림을 채우는 것은 그 분야 전문가(과학자, 기술자, 금융가, 법률가 등등)의 몫이다. 채울 수 있는 자본의 이동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 지지를 어떻게 형성시킬 수 있을까라는 부분에 전략가, 정치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덧. 리프킨이 다른 책을 준비하다가 급하게 '그린뉴딜'을 썼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정치인, 연구자와 함께,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쓰여진 책이라 생각한다. 유명세보다 별로라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추천한다).
일부를 갤럭시S 스마트렌즈로 찍어 문자로 바꾸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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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에너지 환경
World Views and Energy Environments
이제 핵심적인 의문으로 다가가 보자. 당시에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왜 받아들여졌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오늘날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가? 왜 열역학 제2법칙이 확립된 지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야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기계론적 세계관의 경쟁자로 떠오르고 있는가?
앞에서도 본 것처럼 모든 생명현상의 기본은 에너지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태양에서 나온다. 역사 전체에 걸쳐 기술과 제도는 에너지가 환경으로부터 인간과 사회 시스템을 통해 잘 흘러가게 하는 변환자로 작용했다. 어떤 문화가 개발한 특정한 기술과 제도는 그 문화가 속했던 특정한 에너지 환경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여러 가지 에너지 환경은 각각에 맞는 변환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문화 혹은 문명이 발전시키는 세계관은 그것이 속한 특정한 에너지 환경의 거울이라는 것이다.
어떤 문화의 세계관을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왜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에너지 환경이 변하면 사람들의 일하는 방법도 변해야 한다. 즉 환경에서 에너지를 변환하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사람들이 주변환경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나면 그들의 세계관도 새로운 환경을 반영하고 합리화하고 고무하고 설명하는 방향으로 변해간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가지 에너지 환경에서는 한 가지 세계관밖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비슷한 에너지 환경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관이 나왔다. 그러나 어쨌든 세계관이라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속해 있는 에너지 환경과 조화를 이루거나 일치하기는 하는 것이다. 다양한 수렵채취문화의 세계관들은 농업사회에서는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농경사회의 세계관이 산업사회에서 겪을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에너지 환경은 인간이 어떤 신념체계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해 광범위한 한계를 설정한다.
예를 들어 뉴턴의 기계론적 패러다임을 보자. 이 패러다임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의 여러 문화가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에 입각한 환경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형성되었다. 이렇게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이동함에 따라 인간은 순환과 흐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물량과 비축이 중요한 사회로 이동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변화도 그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을 변환하는 것으로 살아가던 문화는 세계를 끊임없는 계절의 순환으로 파악했다. 나고,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과정은 질적인 과정이다. 에너지원은 생기와 다채로움으로 넘쳤다.
재생가능한 자원의 측면에서 볼 때 질서와 쇠락은 세계가 나아가는 방 식을 일깨워주는 지침 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초기 기독교의 세계관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재생가능한 자원에 입각한 에너지 환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을 재생불가능한 에너지 환경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해보자. 석탄과 석유는 무생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고, 아무리 작아도 각 부분은 전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석탄 먼지 하나는 그 구성에 있어 석탄 덩어리와 다를 것이 없지만 나뭇잎은 그 줄기나 뿌리와 크게 다르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은 그 양이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쉽게 계량화된다. 정확한 측정도 가능하다. 가지런히 늘어놓을 수도 있다. 반면에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은 끊임없이 벼하고 흘러간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들은 항상 생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밀한 측정이 어렵다. 뉴턴 패러다임은 수학공식, 측정에 대한 강조, 위치와 거리에 대한 관심을 통해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데 안성맞춤인 패러다임이 되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무한한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해서 세계 전체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사고와 손을 잡았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답 역시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에서 찾을 수 있다. 사상 최초로 거대하고 끝없는, 비축된 태양 에너지가 나타났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30억년 동안 형성된 것이다. 사회가 걸신들린 것처럼 이 에너지 창고를 파먹고 있는 동안 순환과 계절의 개념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수십억년 동안 비축된 에너지의 노다지를 캤는데 매일 태양이 떠서 우리를 비추고 삶의 에너지를 만들어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시간도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과 연관을 잃어버렸다. 시간은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석탄광맥과 유정 속에 들어 있는 태양 에너지를 우리가 얼마나 빨리 뽑아낼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함수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뉴턴 패러다임에서 시간은 사람의 마음대로 빨라졌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이 있으므로 우리는 태양을 마음대로 껐다 켰다할수 있다.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태양을 보통보다 두배 오래 비추게 할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저장된 태양 이 있기 때문이다.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손에 넣자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기댈 필요가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분산, 쇠락, 무질서 등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고, 에너지는 창조될 수 있는 것이며 물질적 진보는 보장된 것이었다.
삶과 그에 관련된 활동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에 합리적 근거를 부여한 것이 바로 뉴턴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도전에 직면해 있고 이제 곧 포기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인간은 재생불가능한 에너지원을 떠나 다시 한번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으로 옮겨 가려는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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