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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남명 조식 선생

by 농자천하/ 2020. 6. 21.

偶 吟
그냥 생각이 나서 읊어봄

/ 남명(南冥) 조 식(曺 植), 1501(연산군 7) ~ 1572(선조 5)


人之愛正士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아끼는 것은

好虎皮相似     
호랑이 털가죽을 좋아함과 같아

生則欲殺之     
살았을 땐 잡아 죽이려 하고

死後方稱美     
죽은 뒤엔 아름답다 떠들어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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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750977582312397&id=100022004854362

浴川(욕천, 냇물에 몸을 씻다)
-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씻어 버리리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만약에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내리

중략

칼을 차고 다니는 선비로 유명한 남명 조식 선생은 敬義와 실천을 중요한 信條로 여기고 평생을 그 뜻대로 살았다. 이러한 모습은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理'로 중시한 동갑내기 퇴계 선생과는 대비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가 늘 차고 다닌 경의검(敬義劍)이다. 이 검에는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검을 수양도구로 삼아 안으로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과단성 있는 실천을 이룩하고자 한 그의 추상(秋霜)같은 사상을 잘 보여준다.

남명 선생의 명성이 조정에 알려지고 그에게 벼슬(정6품직인 종부시 주부, 1551년)이 내려졌으나 완강히 거부했다. 퇴계는 서신을 보내 벼슬할 것을 간곡히 권고했다. 그러나 남명은 답은 간단하고도 정중했다.

"하늘의 북두성처럼 우러러 사모하던 그대의 요청에 따를 수 없는 이유는 나의 경륜 없고 식견 없는 무지몽매함 때문입니다."

중략

4년 뒤(1555년), 단성현감에 선조가 다시 직접 임명하였다. 그러나 남명 선생은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를 올려 또 관직을 거부했다. 단성(丹城)은 오늘날 경상남도 산청 단성면 일대를 말한다.

이 상소는 남명의 시대인식, 진정한 선비로서 인품과 기개가 담겨 있는 소중한 자료다. 일부만 보겠다.

抑殿下之國事已非, 邦本已亡, 天意已去, 人心已離, 比如大木, 百年蟲心, 膏液已枯, 茫不知飄風暴雨, 何時而至者久矣。

"전하(선조)께서 나라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임금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목숨을 기꺼이 내놓고 하는 말이다.

중략

또한, 아래의 단성현감사직소 내용은 스스로 죽을 날자를 잡아 놓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何以當之, 何以收之耶

"자전(慈殿, 문정왕후文定王后)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 고아이실 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문정왕후는 조선 중종의 계비(繼妃)(1501~1565)로 파주 파평 윤(尹)씨다. 중종 12년(1517)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아들 명종이 12세 때 왕위에 오르자 대신 정치를 맡아 권력을 잡았으며, 동생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정도로 최고 권력 실세였다.

그런데 남명은 그녀를 '不過深宮之一寡婦',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오늘날과 비교하지 말라. 당시는 을사사화의 시기다. 하루 아침에 사라져도 할 말 없는 언사인 것이다.

중략

남명은 선조의 초빙을 거부하고 대신에 1568년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의 내용 중 서리(하급관료)들의 폐혜를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 또한 유명하다.

軍民庶政、邦國機務, 皆由刀筆之手, 絲粟以上, 非回俸不行。 財聚於內, 而民散於外, 什不存一。 至於各分州縣, 作爲己物, 以成文券, 許傳其子孫。 方土所獻, 一切沮却, 無一物上納。 齎持土貢者, 合其九族, 轉賣家業, 不於官司, 而納諸私室。 非百倍則不受, 後無以繼之, 逋亡相屬

"군민의 정치와 나라의 여러 사무가 모두 도필리(刀筆吏, 아전)의 손에서 나옵니다. 이들은 대가를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으로 재물을 모으면서 밖으로는 백성들을 흩뜨려 열에 하나도 남지 않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주와 현을 나누어 사유물로 삼고 이를 문권(文券)으로 만들어서 자기 자손들에게 전하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공납으로 바치는 토산물들도 모두 물리쳐서 납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 공납품을 바치는 사람들은 구족의 것을 모으고 가업을 모두 팔아넘겨 관아에 내지 않고 (아전들의) 사삿집에 내는데, 이때 본래 값의 100배가 아니면 받지도 않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이렇게 납부할 수 없게 되니 빚을 지고 도망가는 사람이 줄을 잇습니다."

중략

위 浴川(욕천)의 첫 구절 “온몸에 쌓인 사십년 동안 허물은” 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남명의 학문은 위인지학(爲人之學) -남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학문- 이라기 보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 임을 확인하게 된다. 수신도 제가도 안 된 인간들이 나대는 꼬라지가 참으로 비소(誹笑)를 만들어 내는 시대다. 남명은 시를 통해 '사욕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느낀다.

중략

'참선비' 정신이 남명의 시 '浴川(욕천)'의 전체 내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를 더욱 생각할 때다.

(Aporia, 2020.6.20. 저작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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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 전기 수양론 2004, 정원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조식은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중시하고, 특히 경(敬)과 의(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라고 하였다.

그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하였다. 조식은 특히 실천궁행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學記類編)인데, 그는 이 『학기유편』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마음을 논하는 핵심 및 수신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 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리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초심자에게 『심경』(心經)·『서명』(西銘)·『태극도설』(太極圖說) 등 심성에 관한 글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에 반대하고, 『소학』·『대학』·『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자해자득(自解自得)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식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개인, 즉 사람의 자아를 문제 삼는다. 그는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고 하였다. 조식의 시나 명(銘)에서 보이는 글들은 이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리와 기 개념에 대한 추구보다는 절대자아를 발휘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경(敬)과 의(義) 같은 실천적 개념을 더 중시한다. 이황의 경건함이 이 세계의 객관적인 법칙에 따라 자신을 가다듬는 태도인 데 반해, 조식은 의로움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아를 단련하는 치열한 의식인 데서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조식은 이황의 사칠논변 같은 형이상적 사변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호남학적 경향이나 양명학적 경향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식은 경을 모든 생활의 좌우명으로 해서 살아갔다.

그는 리에 따라 살려고 함으로써 구체적인 모든 사태에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이는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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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은 퇴계 이황에게 “청소하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 입으로만 천리(天理)를 논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고 서신을 보낼 정도로 현실성 없는 논리를 배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