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새로운 교회당을 마련하고 교회 이름을 바꾸었다. 농촌교회로서 이렇게 큰일이 갑자기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하였다. 교회가 시작된 지 40여 년 만에 가장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 교회와 복음선교에 너무나 큰 장애물들이었던 이들이 제 발로 교회를 떠났다. 사실 그 이상 교회를 힘들게 하지 않고 그렇게 정리된 건 사실 보기 드문 일이라는 건 알만한 이는 다 안다. 그런 일을 겪고 있을 때 주변의 마을 분들은 이런 말을 해 주셨다. “그니들 떠났다고 흔들리지 마시유. 건축헌금 안 하려고 그냥 떠나기 민망하니까 그런 거 우리가 뻔히 알고 있슈.”
그런데 그렇게 큰일들을 한꺼번에 치르고 난 다음 나에게 찾아온 것은 패닉에 가까운 소진 상태(번-아웃)였다. 만 2년 정도를 거의 아무 일도 벌이지 못한 채 매일매일 찾아오는 몸살과 급체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도 몸이 건강해야 제대로 잘 수 있는 것이었다. 그 기간에 ‘갈릴리 박사원’의 수업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교회당을 어떻게 복음 선교에 활용하고 지역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며 함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기도하면서 고심을 거듭해야 했다.
밤이고 낮이고 컴퓨터를 켜고 온갖 자료들과 논문들을 찾아 읽었다. 박사원에서 계속되는 세미나 준비만으로도 체력은 한계였다. 계속 보관해두고 학위 논문작성에 참고할 자료들을 그동안 모아두었던 이면지에 프린트를 했는데 책장 하나의 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더는 그렇게 엎드려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교인들과 주민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들어가는 일뿐이었다. 교회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며 교인들을 돌아보는 일만으로는 이미 복음 선교에 한계가 왔다는 것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많은 이들의 공통된 안타까움이었다.
2014년 겨울을 맞으며 내 일생에 또 하나 넘어서야 할 태산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목사’에서 한 사람의 ‘농민 노동자’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독자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다. 몹시 추웠던 그 겨울 3개월 동안 밤낮으로 끙끙 앓으며 호된 시기를 넘겼다.
그리고 2015년 2월 초, 교회당 건너편에 있는 밭 주인을 찾아가 830여 평을 임대하였다. 그런데 목사가 농사짓는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 어르신들이 500평 정도 텃밭들을 떠맡겨 농사 규모는 어느새 1천3백 50평이 되었다.
어느덧 60세가 된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본래 일에는 겁을 내지 않는 편이다. 1천 평이 넘는 밭을 임대하며 ‘작부(作付) 계획’을 고심했다. 당연하지만 애초에 내가 농사를 제대로 지어 보려는 목적은, 물론 ‘진짜 농촌 목사’가 되고 아울러 너무나 비효율적인 농업 노동에 어떤 대안이 되는 길을 찾아보려는 것이었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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