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송경허, "여사미거驪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 "우무비공처牛無鼻孔處"

by 농민만세 2021. 1. 1.

 

 

 

1896년 범어사 선원 개설 후 하안거 결제 기념

 
경허(鏡虛, 1846~1912)

본관 여산 송씨, 이름은 동욱, 법호는 경허, 법명은 성우. 숱한 기행으로 극단적인 평가가 있지만 한국 조계종의 중흥을 이끈 장본인이라는 데는 이의 없음.

1846년 8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부친 송두옥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

1854년 모친의 손에 이끌려 의왕 청계사에서 사미승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음.

1859년 계룡산 동학사 만화 밑에서 불교 경학 수업을 받음.

(1860년 최수운 동학 창건)

1868년 동학사에서 강사로 추대되어 스님들을 대상으로 불교 경학 강의를 시작. 전국 수많은 학승들을 동학사로 불러들일만큼 불교의 모든 경전을 통달한 조선 최고의 불교 경학 강사로 크게 이름을 떨침.

1879년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러 가는 중 천안 근처 마을에 괴질(콜레라)이 창궐하자 허겁지겁 도망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음. 전국의 모든 학승들로부터 강백(뛰어난 강사)으로 추앙받은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며 정신없이 도망치는 한낱 보잘 것 없는 미물임을 깨닫고 대성통곡을 하며 좌절.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동학사로 돌아온 즉시 폐강을 선언하고, "여사미거驪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를 화두로 삼아 폐문하고 필사의 정진에 들어감.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은산철벽의 막막함에 부딪쳐 좌절하여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딛쳐 수마를 쫒으며 필사적으로 정진하던 중에, 

1879년 11월 15일 동학사 산 아래 마을에 살던 이 처사의 "牛無鼻孔處"(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라는 말을 전해 듣고 확철대오.

1880년 충남 서산시 고북면 천장암에 보림 후 오도송.

무비공심(無鼻孔心)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 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홀연히 뚫을 코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닫고 보니 온 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서
들사람이 일 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1882년부터 1898년까지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의 절인 동학사, 서산 부석사, 마곡사, 장곡사, 보석사, 예산 용문사, 대전 묘각사, 사불산 대승사, 문경 봉암사 등지에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진작. 또한 수월 침운 혜월 만공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지도.

1898년 충남 서산 부석사에 주석하던 중 동래 범어사 계명암의 초청을 받아 제자인 만공 침운과 함께 영남 최초의 선원을 개설 하안거를 지도. 그해 겨울 청암사 수도암에서제자 한암중원을 만남.

1899년 가야산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긴 후 고종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를 설치하는 불사의 법주로 추대되어 수선사를 창설하고 상당법어. <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등의 글을 남김.

1900년부터 1903년까지 해인사 범어사를 비롯한 경상 일대의 사찰 뿐만 아니라 송광사, 태안사, 화엄사, 지리산 천은사, 영원사, 실상사 등 남도의 사찰들을 둘러 보며 선사들의 영찬을 써주고 선원도 개설.

1904년 천장암에 들러 제자 만공월면에게 전법게를 내린 후 함경남도 삼수 갑산을 향해 누더기 옷에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홀로 길을 떠남.

1905년 강원도 월정사에 머물며 3개월간 강의.

1906년 안변 석왕사에서 나한개분불사 증명.

1906년부터 1912년까지 평안북도 강계, 위원, 함경남도 삼수, 갑산, 희천 등지에서 박난주(朴蘭州)로 이름을 바꾸고 환속. 머리를 기르고 선비 갓을 쓰고 서당의 훈장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등 신분을 숨김. 이때 당대의 신지식인이며 독립 운동가였던 김탁, 김수장 등과 함께 민족의 앞날을 고민. 함경도 삼수 갑산에서의 행적은 재가제자 김탁 등에 의해 수덕사에 전해짐. 김탁은 상하이 임시정부 발족을 위한 국민대표 250인 중 한 명.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 흰 구름에 부치노라

1912년 4월 25일, 동네 훈장을 하던, 함남 갑산군 웅이방 도화동에서 입적. 이때 옷 소매 속에 임종게를 남김.

心月孤圓(심월고원)
光呑萬像(광탄만상)
光境俱忘(광경구망)
復是何物(부시하물)

마음 속 홀로 둥근 달
빛은 만상을 삼키네
그 모든 것을 다 잊었으니
이것이 다 무엇인가

1913년 1년 뒤 입적 소식을 들은 제자 만공과 혜월이 갑산 난덕산에서 스승의 유골을 수습하여 다비식을 치름. 다음은 만공의 게송.
 
舊來是非如如客
難德山止劫外歌
驢馬燒盡是暮日
不食杜鵑恨小鼎

시비에 물들지 않은 나그네가 있어
난덕산에서 겁 밖의 노래를 그쳤네
'나귀'도 '말'도 타서 재가 된 저문 날
먹지도 않는 소쩍새가 '솥 적다' 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