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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네비우스를 아시나요? 3

by 농자천하/ 2021. 8. 7.

한마음 칼럼 : “다시 만나는 네비우스-3”

(칼럼 쓸 여력도 없이 사느라, 전에 써 놓았던 ‘네비우스’ 이야기를 다시 올립니다)

존 네비우스는 최초로 ‘우리말 성서 번역’을 한 존 로스 선교사와 깊은 교류를 나누었으며, 로스의 영향으로 저 ‘네비우스 10대 선교정책’ 중 성서 번역과 신앙 도서들의 한글 출판 등을 추가하였다. 본래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정책은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등 3자(三自) 정책’이었고 이는 중국 교회의 3자 곧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기초가 되었다.

존 로스 목사는 우리 개혁주의교회(장로회 교회)의 고향인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는 특히 당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우리 한반도에 큰 관심을 두고 만주에 머물며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1872년, 함경도에서 만주로 건너갔던 서상륜 백홍준 이응찬 등 청년들을 만났고 동료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함께 누가복음서를 최초로 1882년에 우리말로 번역 출판하였다.

이 과정에서 회심한 서상륜 등은 우리말 누가복음을 봇짐에 지고 압록강을 건너와 전국을 돌며 ‘매서인(賣書人)’으로 활동하며 전도하였다. 또한 ‘전도 부인’들도 방물장수처럼 성서를 싼 봇짐을 이고 전국의 마을들을 찾아가 머물며 성서를 팔고 읽으며 한글을 가르치는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 후 1884년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우리 땅에 왔을 때는 이들의 활동으로 생겨난 교인이 무려 1만2천여 명이나 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그렇게 자생적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는 1883년 황해도 장연군의 소래/솔내교회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상륙보다 먼저 성서가 번역되고, 그 성서를 자발적으로 퍼뜨리며 자생 교회를 세운 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에도 다시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성서를 사서 읽고 가르치며 예배하는 최상의 교회로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계속되는 일체 강점기 치하의 민족적 좌절과 이어진 6·25전쟁 등으로 한국교회는 무속적 기독교로 크게 변질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언더우드 등 일단의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왔을 때의 한국 초기교회의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열정과 우월감만으로 한국에 왔던 그들에게 이런 조선 교회의 모습은 대단히 낯설고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네비우스가 역설한 3자 선교정책과 더구나 자국민으로 교회 지도자를 세우라는 선교 원칙을 배웠는데도, 그들은 무려 25년 만에야 어쩔 수 없이 한국인 목사를 교육하면서 ‘너무 수준 높은 신학교육을 하지 말라’는 한심한 원칙을 내세웠다.

그들은 소위 ‘1907년 대부흥 현상’ 이후에야 한국인 목사를 안수했는데, 그들이 D. L. 무디의 ‘대규모 부흥집회 운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1907년 대부흥’이 한국교회 무속화의 결정적인 촉발점이기에, 그것을 거슬러 네비우스를 제대로 다시 만나야 한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