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마음 칼럼 : “교회, 또 하나의 생태계 8 - 회개와 중생이 없는 구원이라니?”
교회라면 최소한 예배 - 교육 - 선교 - 봉사 - 친교, 이 다섯 가지의 요소가 모두 골고루 교회 안에서 특히 밖에서 실천되고 있어야 건강한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라 하였다.
당연히 이런 올바른 과정을 통해서 교인도 많아지고 재정도 부족하지 않게 되어야 했지만, 우리 한국교회는 그렇게 우리 본연의 정체성과 내실을 다지며 가르칠 새도 없이 사람들이 마구 몰려든 것이 너무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주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그처럼 ‘일단 많이 모이고 넘치는 재정을 맘껏 사용하라’는 것이었을까? 결단코 그럴 수는 없기에 이런 아픈 성찰을 계속해야만 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지난 140년 역사에서 “1907년 대부흥”은 누구나 흠모하고 기대하는 엄청난 역사로 알고 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에 실제로 당시 교회는 321개에서 642개로 200% 증가, 전도소(개척교회)는 470개소에서 1,045개소로 222.3% 증가, 세례 교인은 9,761명에서 18,964명으로 194.2% 증가, 특히 학습교인(세례 전 준교인)이 30,136명에서 99,300명으로 무려 329.5% 증가, 헌금이 1,352,867원에서 5,319,785원으로 역시 393.2%나 증가한 것으로 나온다.
초창기부터 개신교회에는 이처럼 교인 수나 헌금 액수까지 정확한 통계가 있었다는 점도 귀하지만, 보다시피 교인 수와 헌금이 무려 2~3배나 넘게 늘어난 사실은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너나없이 이런 폭발적인 증가에 고무되었고 오늘날에도 또다시 이런 부흥을 모두 꿈꾸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 “과연 그러한 양적 증가가 진짜 복음의 능력을 잘 나타내서 일어난 일이었을까?” “그런 양적 증가가 과연 교회의 부흥이고 복음의 부흥일까?” “그렇다면 지난 140년이나 되는 교회 역사의 결과는 어째서 이토록 비참한 걸까?”
내가 이곳에 처음 부임해서 얼마나 많은 특별기도회, 24시간 연속 기도회, 새벽기도회를 하였나? 그때 잘 참석하지 않았던 교인들이 지금 남아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특히 24시간 연속 기도회 때에 소위 방언이 터지고, 예언한다, 능력 받았다, 병이 나았다고 했던 이들이 어떤 자들이었나? 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에 크게 감화되었던 이들이 자기네 마을에서 지금까지 어떤 손가락질을 받으며 전도를 가로막는 자들인가?
사실 ‘1907년 대부흥’에 대해 당시에도 그렇게 찬양 일색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보고 크게 걱정하고 우려했던 이들의 기록이 적지 않다. 십자가 은혜 아래에서 깊은 회개로 거듭나 성화 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차근차근 이 위대한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어야 했다. 성공회가 영국 국교가 되면서 회개와 중생이 필요 없는 구원이 되었었던 역사를 보라. 우리가 진정 개혁자들과 청교도의 후예라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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