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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교회, 너 바벨론아! 04

by 농자천하/ 2023. 3. 18.

한마음 칼럼 : “교회, 너 바벨론아! 04”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을 위해 모이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그 누가 자신의 구원 문제, 그러니까 한 인간으로서 절감하는 어떤 구원의 문제 때문에 교회 나오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요즘 세상에 그 어떤 교회가 이것을 정말로 진지하게 설교하고 진짜 자신들의 주제로 삼고 있을까?

하지만, 틀림없는 건 그래도 어디엔가 몇 사람 모이지 않은 작은 교회당에서 누군가는 ‘그래도 이게 우리 복음이다’라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앞에서의 회개와 구원을 설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틀림없는 건 그런 목사와 그 가정은 결단코 늘어나지 않는 교인 수로 당연히 물질적인 가난을 헤어나지 못할 것이고, 또 그들은 그런 가난 속에 성장하는 자녀들을 보면서 남모를 고통을 겪겠지만 동시에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복음을 포기하고 축복을 남발하는 설교는 영영 하지 못할 것이다.

가끔 불교 TV를 보면 요즘은 불교도 아주 똑똑해(?)지고 있는 걸 본다. 어차피 절집을 찾는 이들도 불교의 본래 가르침쯤이야 듣고 흘릴 것으로 여길 터이다. 그들의 본심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속세의 소원이 신묘막측하게 다 이루어지는 영험한 기도능력을 보려는 것이다. 이런 중생의 기대를 불교도 재빨리 알아차리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제는 절집을 지어도 고즈넉한 그런 분위기로 건축하지 않는다. 넓디넓은 터에 황금빛 거대 불상과 거대 범종을 수십 수백 기씩 설치하여 사람들을 단번에 압도한다. 기독교처럼 이제 드디어 불교도 똑똑하게 현대화 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로 장거리 이동하면서 발견하던 ‘불교 기도원’ 간판들은 어느새 낯설지 않다. 이제 우리 한국에서는 불교와 기독교가 드디어 ‘기도’로 평화로운 종교 통합을 달성한 거다. 가끔 불교TV를 보면 화면이나 용어만 불교이지 추구하는 것이나 방식이 기독교와 깜짝 놀라도록 닮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긴 시간 온통 한자로 된 불경을 읽고 해설한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욕망에서 오는 허상이니 마음 두지 말라는 거다. 그리고 마치려고 합장을 하면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자, 그러니 내 말을 따라서 합시다..”. “잘 된다! 자알~ 된다! 두루두루 자알 된다!” “ㅇㅇ법당에 오면 소원성취! ㅇㅇ스님한테 오면 다 자알~ 된다!” 따라 하는 불자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그 절집은 대박이 난다.

오늘날 기독교는 도대체 무얼 설교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관계 변화 없는 기도 응답, 삶과 인격의 변화와 성장을 도외시한 믿음, 자기 생각으로 꿰맞추는 하느님의 섭리, 십자가 없는 영생, 회개 없는 구원... 이런 자기 편익 아전인수 기독교, ‘하나님, 내 말 안 들어주면 나한테 죽어!’라는 전狂훈의 망발에 열광하는 그 교회 대박 난다.

그리고 이것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인정해 준 우리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다.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