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나는 무얼 바라 여기까지 06”
어느덧 38년 복무를 마치려니, 단 한 점도 여한이 없는 게 놀랍다. 늘 말이 없던 아내가 요즘 많은 생각이 드는가 보다. “남들은 박수와 꽃다발 속에 ‘은퇴식’을 하나 보던데, 우리는 교회 사정 봐주다가 은퇴도 참 유별나게 하네요.”
대 환장할 일들이 난무하는 교회를 갈아엎느라 한계 상황을 연속 맞고 있을 때, 아내는 무심하게 한마디 했었다. “내가 직장이라도 나가야겠어요.” 그리고는 버스로 1시간씩 출퇴근하는 직장도 마다하지 않았고 벌써 15년째이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그나마 보조 업무라도 2년 후면 끝나게 된다. 교회당 이전 직후 방문했던 어느 교회 집사님들이 그랬다. “극한 직업이 따로 없네요~”
그런데 이제 와 보니 이 모든 일을 교인들은 오히려 ‘당연한 일’로 여겨 왔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해 그 누구도 ‘우리가 더 이상 이러면 안 된다’며 어떤 대책이라도 마련하려는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아직도 교회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진작에 새로운 목회자가 와야 했고 나는 그렇게도 간곡히 부르던 교회들로 갔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며 지시하신 말씀(마 10,5-16)을 아쉬움 없이 행했다. 저 마지막 일곱 번째 외에는 말이다. “첫째, 길 잃은 양에게로 가라. 둘째,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라. 셋째, 병들고 죽고 나병에 걸린 이들의 악한 영성을 쫓아내라. 넷째,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다섯째, 여분의 돈이나 배낭 옷 신발 지팡이(보호용)도 갖지 말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 여섯째, 어디든 머무른 곳에 평안을 빌어라. 일곱째, 너희를 영접치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떠나라...”
지난 21년 동안 나는 과연 내 주님 되신 분께 참으로 충성한 것일까? 어차피 안 되는 걸 내가 ‘왜 안 되냐’고 이토록 고집을 부려 고생만 한 게 아닐까? 지난 38년 동안 매 순간 혼신을 다해 달려온 목회를 미련 없이 완전히 내려놓는 지금, 다만 이 한 가지가 마음을 어둡게 한다. 도대체 더 무슨 책임을 지겠다고 나는 아이들까지 희생시킨 것일까? 과도한 것을 희망한 不忠은 아니었을까.
요즘 장거리 운전하다가 어떤 가수가 부른 이런 노랫말이 머리에 맴돈다. “난 차암~ 바보처럼 살았군요~!” 아이고, 단단히 시험 든 게 틀림없다. 무슨 여한이 있을 리도 없지만 ‘교회 하나 살려보자’고 너무 지나친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죄이다. 여차하면 아직도 험악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여전히 시퍼런 내 속의 검이 날뛰지 않도록, 저 갈릴리 광야에 여전히 홀로 계신 나의 예수님께로 그야말로 죽을힘 다해 모든 순간에 나를 내려 세워야 한다.
아직도 미진한 일들이 어서 좀 마무리되면 한 1년 이상 기독교회를 완전히 떠나 있어 볼 것이다. 기독교가 오늘 세계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의미가 더 있는 건지 알아봐야겠다. 찬미, 갈릴리 예수님!
(한마음 칼럼-끝 / 聾 )
'[갈릴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역 후 다섯째 날] '응징'을 생각하다 / 종교개혁을 부른 막장 교황들의 탐욕? 이게 남의 일? (0) | 2023.11.04 |
---|---|
[전역 후 첫째 날] 갈릴리 농민신학을 생각하다 (0) | 2023.10.31 |
[한마음 칼럼] 나는 무얼 바라 여기까지 05 (0) | 2023.10.21 |
[한마음 칼럼] 나는 무얼 바라 여기까지 04 (0) | 2023.10.18 |
이 '실패한 혁명들'을 포기 못하는 나는 이제 자유로운 파르티잔이다! (0) | 2023.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