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최고의 명 설교, 자고로 설교는 이래야~
교인들도 이 정도의 설교를 소화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국교회가 바로 선다!!!!
교회와 국가
유경재 목사(안동교회 원로) / 예장 목회자 시국 기도회 (2016년 12월 4일)
사무엘상 8: 1-22, 마가복음 10:35-45(42-45)
요즈음 참으로 추악하게 얼크러진 정치권력의 몰락을 보면서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의 권력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국가에 있는 교회는 지금까지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명박 정권 시작되면서 한국교회는 그 정권을 적극 지지하기 시작하여 박근혜 정권까지 기도로 뒷받침(?)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이 추악한 사태에 대해서 한국교회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가가 무엇이며 이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일본 한 대학교의 철학교수인 카야노 도시히토가 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국가의 성격을 설명하였습니다.국가가 주민들에게 ‘공물과 조세의 지불’에 대한 대가로서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결코 주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국가가 폭력을 축적함으로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주민의 안전이 아니라 그 자신의 보전이다. 국가에 있어서 ‘군사적인 보호’의 의미는 다른 행위주체들의 공격으로부터 그 토지에서 자신의 폭력의 우위성과 부의 징수 권리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 … 국가는 주민들이 자신의 안전을 목표로 설립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하나의 행위주체가 주민들을 지배하고 그들로부터 부를수탈함으로써 국가는 만들어진다. 주민의 보호는 그로부터 파생하는 하나의 부수적 활동에 불과하다.1) 카야노
국가는 결코 국민의 안전을 목표로 설립되지 않는다 말은 충격입니다. 요즈음 일어난 사태를 보면 이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 동안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자기와 가까운 몇 사람의 사익과 자기권력을 지키려고 했을 뿐입니다. 박노자 교수는 한겨레 칼럼에서 “박근혜 행정부는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이라는 비합법적 방법으로 관료체계를 편법적으로 장악한 사조직에 가까웠다”고 하였습니다. 2) 국가권력을 사유화했다는 말입니다.
경제성장은 더 많은 부를 수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수탈한 부는 행위주체인 정권을 더욱 강화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재벌과 관벌들이 대주주로 있는 하나의 주식회사라면, ‘최순실 게이트’란 일부 대주주와 지배인, 그리고 지배인의 측근들이 작당해서 회사 운영을 사리사욕에 희생시킨 배임사건 격이 될 것”이라고 박 교수는 지적하였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일은 부수적 활동이라는 말은 세월호사건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가를 볼때 구약의 사무엘 예언자가 왜 왕을 세우기를 거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그때 도시히토 교수가 정의한 국가의 폭력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권한은 이러하다. 그는 너희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그는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왕의 밭을 갈게도 하고, 곡식을 거두어들이게도 하고,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다. 그는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것이다. 그는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왕의 신하들에게줄 것이며, 너희가 거둔 곡식과 포도에서도 열에 하나를 거두어 왕의 관리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그는 너희의 남종들과 여종들과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과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의 일을 시킬 것이다. 그는 또 너희의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너희들까지 왕의 종이 될 것이다. 삼상8:11-17
사무엘이 전한 야훼의 말씀인데, 이 말씀 어디에도 왕권이 주민들을 보호하고 돌본다는 말은 없고, 폭력으로 징발하고 부를 착취해간다는 말만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의 실체입니다. 2) 한겨레, 2016.11.30.
구약성경의 두 가지 전승
구약의 역사를 보면 많은 전승이 형성되어왔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선택과 편집의 과정을 지나서 점차 고정되어 몇 개의 군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전승들 중 중요한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족장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 출애급 홍해를 건넌 일 시내산 계약 가나안 점령 여기까지는 북광국에서 형성 보존된 것이고, 이것을 보통 출애급 전승 혹은 ‘모세 전승’이라고 합니다. 다윗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 시온의 선택 등은 남쪽 유다에서 형성된 것으로 ‘시온-다윗 전승’이라고 합니다.
이런 전승들이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남쪽 유다로 옮겨졌고, 유다와 예루살렘만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들이 이스라엘 전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북왕국 역사의 유산들도 그들에게 속한다고 확신하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시온-다윗 전승은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그 전승을 강화하는쪽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이 나중에는 다윗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전승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애급 전승은 이집트의 강력한 폭군이었던 바로의 억압통치로부터의 해방이 그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왕이 통치하는 왕국 혹은 왕조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만이 그들의 통치자가 되실 수 있다고 믿고 출애급 후 상당기간 나라 없이 지파동맹 형태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 때에 이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왕을 요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출애급 전승은 처음부터 국가 형성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승이 남왕국에 전해지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고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북왕국에서 출애급 전승에 기반을 두어 예언활동을 한 예언자는 엘리야와 그리고 아모스나 호세아입니다. 북왕국 주민들은 하나님이 저들을 구원하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반해,예언자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올바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대신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따른다고 외쳤습니다.
북왕국이 멸망한 후 출애급 전승을 이어 받은 예언자는 이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입니다. 이들은 시내산 계약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파기되었고, 하나님이 남은 자를 통하여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이룩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자들은 누구도 다윗의 왕조가 다시 세워지고 그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국가를 형성하고, 그 권력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타락하였기 때문에 국가 권력은 철저하게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그리고 예언자들은 남은 자를 통한 새로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국가와 그 정치지도자들은 심판으로 다 소멸되고, 남은 자들 곧 ‘곤고하고가 난한 백성’을 모아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를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
나 주가 선언한다. 그 날이 오면, 비틀거리며 사는 백성을 내가 다시 불러오고, 사로잡혀 가서 고생하던 나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겠다. 그들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비틀거리며 살고 있으나, 거기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강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 때로부터 영원토록, 나 주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 미가4:6-7
하나님 나라는 권력을 가진 자, 기득권자들, 횡포와 착취를 일삼은 기업가들은 배제되고, 대신 고난당한 자들, 버림받은 자들, 가난한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예언하였습니다.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이런 사상은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지만, 그는 시온-다윗 전승이 말하는 왕조의 후계자로, 군림하는 지배자로 오시지 않고, 가난한 자로 오셔서 고난당하고 왕조 전승의 신봉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아이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윗왕국의 회복을 기대하며 자리를 탐할 때 지배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고, 모든사람의 종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국가는 근본적으로 지배하고 명령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고 보셨고, 하나님 나라는 그와 반대로 봉사하며, 서로 섬기는 나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철저하게 국가폭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통하여 이룩되는 새 나라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셨으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되고 착취당한 민중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하며그 아픔을 쓰다듬어 주면서 위로하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결국 여기서 이렇게 섬기는 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지배와 착취 대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고 섬길 때 정의 곧 올바른관계가 이루어지며, 화해와 평화가 전파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민중이 깨어나게 되고 불의한 세력에 맞서며 국가에게 위임하였던 ‘정당한 폭력’을 회수하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생명공동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국가를 향한 교회의 사명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가 성경의 관점에 볼 때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국가를 떠날 수 없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국가를 향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요?교회의 사명은 이 국가를 바로 세우는데 있습니다. 장신대 전총장인 김명룡은 다음과 같이 그 사명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를 통해 국가가 나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야 한다. 교회는 국가가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세계를 만들도록 방향을 지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통치를 국가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참여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국가가 잘못하고 있을 때 이를 개혁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거나 오늘날의 국가들을 볼 때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받아드리기보다 심하면 핍박하고, 아니면 무시하고 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는 결코 민주주의의핵심요소인 평등주의나 복지주의를 실현할 의지가 없습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압박하며 저들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평등주의는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국가는 성경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대척점(對蹠點)에 있습니다. 국가는 항상 위임받은 폭력을 정당하게 사용하여 국민을 보호하고 섬기기보다는 지배하고 명령하고 기만하며 착취하려 합니다. 그 폭력을 언제나 부당하게 행사하여 소수의 가진 자들을 편들어주고 다수의 가난한 자들을 더욱 가난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나 저들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하며, 그 불의를드러내고 저들의 거짓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지 않는 정권을 물러가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광화문광장에 몰려들어 촛불을 밝히는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입니다. 그리고 섬기러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약한 자들, 눌린 자들, 가난한 자들 편에 서서 저들을 변호하고 저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국가폭력에맞서 그 폭력으로 고난당하는 가난한 자들의 진정한 메시아로 거듭날 수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지금 잘못 선택된 대통령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 놓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 말씀에 비추어 오늘의 역사를 보아야 하는 교회가 이 어둠을 밝히고 갈 길을 보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거짓 예언자처럼 모든 불의를 ‘안보’의 이름으로 용납하여 왔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둔함과 용기 없었음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저희를 용서하시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이 난국을 헤쳐 나가게 하시고, 새로운 아침을 맞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위기를 통하여 다시 한번 중요한 역사의 교훈을 우리 속에 새기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행진을 더욱 활기차게 이루어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왼쪽이 유경재 목사님, 오른쪽은 서광선 목사님
실로, 이런 어르신들께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운 후배들이다!
내가 이 분들의 나이를 살고 있을 때
딱! 이 모습으로 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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