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이 유명한 1991년 김지하의 칼럼은 나와 아내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었다
당시 경북의 한 산골짜기 교회에서 세살 한살 된 아가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한 주간 학업을 마치고 주말이면 서둘러 광나루 기숙사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대여섯 시간 후 시외버스는 산으로 둘러 쌓인 시골 읍내 터미널에 도착했다
막차가 끊긴 늦은 밤 가로등 몇 개 겨우 불밝힌 읍내 거리는 적막하기만 했다
교회까지 세 시간을 넘겨 걸어야 하는 비포장길인데 두 시간 반이면 충분했다
조금 기울어진 보름달 빛이 골짜기 커다란 바위들에 반사되어 천지가 훤했다
학교 도서관 로비에서 읽은 며칠 지난 조선일보 칼럼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실망 울분 이율배반 무슨 배신감이 그를 통해 얻었던 통쾌감 만큼이나 컸다
누구에겐가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건 아직 어린 청년들의 특권 아니던가
여튼 당시로서는 도서관 로비에서 나도 모르게 '꺽!' 하고 비명 지를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칼럼 제목이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앗차, 조선일보 활자 놀음에 처음부터 말려 칼럼 제목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게다
앗차차, 이제 돌이켜보니 칼럼의 내용을 제대로 읽어 본 적도 없구나 어이쿠야
그냥 '김지하가 왜 조선일보에?!' 더구나 '죽음의 굿판'이라니? 그뿐이었던 거다
하긴 그의 생명 사상이 투쟁심 약화시키려는 수작으로 여겨져 극렬 경계했었다
민중신학이 웬 생명신학으로 '변절'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여 아예 손절했었다
아직 젊음이라는 건 치기어린 그만큼 선명하다는 특장점도 갖고 있는 거니까
6년 전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공동체'를 쓰고 있을 때는
그의 '밥 론'을 그래도 외면할 순 없어 최대한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그랬었다
작년 그가 고인 되었을 때 참 안 된 말이지만 '잘 뒈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고 그 놈의 이념이라는 거 모든 이데올로기는 가진 것들만을 위한 장난질
여튼 그만큼 저 칼럼의 파장은 엄청났다 헌데 나는 그에게 무슨 권리로 그랬던가
웃기는 거다 아무리 어린 마음이라도 누군가를 환호하고 멋대로 실망하는 거
가난한 신학생이 없는 돈을 털어 마치 한 시대의 무슨 전사나 된 양 사서 읽었던
그의 책들을 모조리 내다 버렸던 게 참 후회 막급인데 그래도 하나 남아 있구나
1994년 발간된 시집이니 그 이후에도 나는 김지하를 계속 읽고 있었던 거다
기독교의 확증편향 이란성 쌍둥이 '진영주의'의 자가당착에 몹시 심난한 요즘
30여 년 전 김지하의 경우가 무엇이었던지 우선 저 칼럼부터 다시 읽어야겠다
이제는 중간 제목 "죽음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는가"가 눈에 훅 들어와 박힌다
그 치열했던 한사람 시인을 기억하면서 이제라도 고인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
한 권 남아있는 시집에서 1994년의 그는 흔들리는 괴로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중심의 괴로움
-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 시집 《중심의 괴로움》(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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