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封駁/諫諍] 2015.10.31
010 / 종교개혁은 신봉의 대상인가?
(신 5,7)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이 십계명의 제1계명은 구약성서를 정경으로 받들고 있는 유대교나 기독교 공히 그야말로 ‘지상 최고의 절대적인 계명’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그에 대하여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하고 있지만 말이다.
성서는 이처럼 ‘다른 신’들을 두려는 우리의 본성을 매우 경계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이들의 말처럼 야훼 하느님이 자신이 없기 때문인 걸까? 그렇지 않다. 이는 그야말로 ‘야훼 하느님 한 분께만 예속됨’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다는 최고의 자신감이 넘치는 말씀이다. 야훼 하느님 이외의 대상에 속박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성을 상실하는 줄도 모르게 되고 거기로부터의 구원 해방을 깨우쳐 주는 것이 성서요 또한 십계명인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유일신 하느님을 신앙하는 것이 자신들의 특별한 정체성이라고 하는 기독교가 이에 대하여 그 어떤 분별도 없이 갈지 자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을 본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은 정작 자신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땅바닥이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느닷없이 자신의 얼굴로 덤벼들었다고 착각한다.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교회’곧 ‘개신교’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란 보장이 있는가?
해마다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뷔텐베르크 교회당 게시판인 현관문에 내걸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날이다. 총회 산하 신학교에서는 ‘종교개혁제’행사가 치러지지만, 이때쯤이면 5백여 년 전에 자신들이 시작된 ‘종교개혁주일’이 있다는 사실도 개신교회들은 기억도 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니 참 한심한 일이다. 또 한 편에서는 그와는 반대로 ‘종교개혁’을 저 사악한(?) 교황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사건으로 여기며 절대시하기도 한다.
이런 자들은 구교회 특히 서방교회인 천주교(가톨릭교회)를 ‘이단’시하고 아예 악마화 하기도 한다. 이게 다 종교개혁을 하나의 역사적 사회적 현상으로 보고 그 한계와 교훈 등을 제대로 연구하지는 않고 그 자체를 교조(敎條)로 삼은 결과물이다. 신학생 때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오히려 반감이 들도록 떠받드는 교수에게 레포트를 제출했다가 거의 경고에 가까운 소리를 들었었다. 자신이야말로 진짜 복음주의자라고 자부심 가득했던 교수였다.
그 때 제출했던 치기어린 과제물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종교개혁이 어째서 신봉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16세기 유럽과 독일이라는 특정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는가? 종교개혁이 예수를 능가하는 진리란 말인가? 종교개혁이 예수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이라든가 교훈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진짜 필요한 게 아닐까?”그 날 밤늦도록 도서관 앉아 마르틴 루터와 존 칼뱅의 일대기를 읽으며 무지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의 신학적 주장들보다 오히려 그들의 인간적 고민과 삶이 더 해답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혼자 고민했던 건 이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로 돌아가자’면서 왜 ‘바울로 돌아갔을까, 예수가 아니고?!’”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 연구’는 아예 없던 때였고, 또 개혁자들이 당면한 과제는 당시 서방교회가 정말이지 민망할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가르치고 주장하던 교회들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는 우리가 ‘항상 깨어서’경계해야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와는 또 다른 것 같지만 똑같은 일이 저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늘 일어난다. 아주 유명한 어떤 설교자들의 설교를 보면 이게 ‘예수 그리스도교’인지 아니면 ‘바울교’인지 헷갈릴 때가 정말 많다. 그만큼 별 생각 없이 성서를 읽고 설교하기 때문이다. 정녕코 자신과 동시대의 한 갈릴리 사람에게 그토록 천착 되었던 바울의 신학적 토대 곧 그의 실존적 상황은 배제하고 바울을 말한다고?!
어쨌든 종교개혁 신학도 5백여 년 전 그것도 당시 독일과 유럽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상황신학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고, <개혁 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존 칼뱅마저 배신한 것도 모르는 채 ‘또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줄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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