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封駁/諫諍] 2014.10.22
006 / 전업 목회? 겸업 목회?!
‘전업 목회 - 겸업 목회’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좋은 사정을 만나 전적으로 ‘전업 목회’를 하는 행운이 있는 자들이 다른 생업을 겸하면서 목회를 해야 하는 이들에 대한 교단적 정책을 논하고 총회 법 규정을 보완하거나 결정하겠다니 한심하고 어이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물론 전통적인 목회를 훈련받았고 주일학교 시절부터 ‘주의 종은 세상일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세상 일을 하면 하느님이 진노하신다’는 교회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교회와 세상은 당연히 구별을 넘어 구분 되어야 하고 나아가 분리되어야 마땅하다는 전통적인 장로회 교회에서 성장했다. 누구만큼 그리스도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 은혜에 대한 확신을 설교하고 성도들과 나누는 전형적인 교회 목회자로 당연히 살아왔다. 지금도 그에 대한 목마름은 여전하다.
평범한 농촌교회 주변 마을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생기는 지역사회의 환경변화로 ‘다문화 특수 목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내몰린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탄식하는 아픈 말씀을 들었다. “전통적 목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교회가 처한 사회적 환경 변화 곧 교인 수의 급감 내지는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더 이상의 전업 목회를 포기하고 겸업 목회현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목회자들의 심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고백이다.
피해갈 수 없는 이런 사회적 상황에 놓인 ‘작은 교회들’은 비단 농어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농촌이든 도시든 이제는 ‘목회자의 겸직/겸업’ 문제를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 요즘은 전설 같은 바울의 이야기 속에만 있는 <자비량 목회>(Tent Maker 사역)을 자신들은 피하고 살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기는 자들이, 노회든 총회든 모여 앉아 이 문제를 단순히 ‘목회자의 생계비 해결 차원’으로만 거론한다는 건 다시 말하지만 참으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목회자의 겸업 사역이야말로 오히려 ‘생활인 성직자’로서 언제나 하느님 나라의 구속사(救贖史)가 역사하고 있는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래서 이미 처음부터 있어야 했던 ‘선교적 목회자’들이라는 관점이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를 교단 차원에서 적극 독려하며 응원하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지금껏 교회 울타리 밖의 현실을 교인들에게만 맡겨두는 폐단은 영영 고쳐지지 않을 것이고 한국교회의 무력감 또한 극복해낼 날은 요원할 것이다.
해외 사역은 ‘선교’이고 국내 사역은 ‘전도’라고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용어도 문제일 뿐 아니라 교회당도 존재하지 않는 해외 선교현장에 파견된 목회자는 일반 노동부터 마다하는 일 없이 해야 하는 게 당연하고, 국내 사역현장에 파견된 목회자들은 ‘전업 목회자’여야만 제대로 된 성직자요 목회자로 여기는 이런 그릇된 관점부터 바뀌어야 한다. 교인들을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교회당에만 모아놓으려는 것을 <가두리 양식 목회>라고 탄식하는 자성의 소리도 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 용감히 응대하는 ‘겸업 선교 목회자’들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교회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웃을 만나고, 교인들의 삶의 현장에 동참하는 사역을 해 보자고 나서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도록 변화되는 시대적 정황을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전업 목회라는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 자체를 혁신하는 고통을 딛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겸업 목회자’들도, 현 세상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있는 목사들이다.
우리의 갈릴리 예수님은 교회당을 먼저 세워놓고 사람들을 모으시지 않았다. 가버나움으로 몰려든 수많은 이들을 치유하셨으나 그들을 모아 교단을 조직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만들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런 일을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모여든 이들을 치유하신 다음 그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되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또 다른 마을을 찾아 들어가셨다. 물론 누구나 다 겸업 목회자가 되어 한 주의 엿새 동안 꼭 세상 속에서 분투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교회 등의 지원을 받아 세상 속에서 선교를 감당했듯 기존의 교회를 목회하는 전업 목회자들과 그 교회들은 바로 그런 안디옥교회가 되어야 한다. 겸업 목회자들 또한 더는 의기소침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새 소명의 사람으로 더 당당하게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聾)
원글 보기 : 충남노회 구 게시판
http://old.cnpck.org/index.html?ClassID=Bulletin&SectionID=4&LinkID=16&act=view&page=32&num=495&seq=1698&replynum=495&
마을목회신문 게재
http://www.maeulch.net/news/29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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