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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신학운동]

[갈릴리 신학원] 종교개혁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농자천하/ 2017. 4. 17.

*** 갈릴리 신학원(박사 과정) 수업을 다시 시작하였다

 

갈릴리신학대학원 (2017년 봄 학기) / 종교개혁사 / 과제물

 

종교개혁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지난 역사는 오늘의 나와 나의 현장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떤 비전을 얻게 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 어떤 위대한 역사라도 나에게 살아있는 역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 교회의 출발선이 된 <16세기 유럽의 교회갱신운동>이 오늘 나의 현장 곧 연 순소득 1천만 원을 밑도는 고령의 농민이 60% 이상이며 대부분이 영세 귀농인들인 농촌 현실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1. 우리는 ‘갈릴리 농민(농촌 민중)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여전히 간과하고 있다.

 

    나의 목회현장인 농촌의 현실에 희망이 되는 복음은 ‘바울의 도시중심 교회건설 운동’이 아니라 ‘갈릴리 농민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농촌 도시를 망라한 양극화의 구조적 그늘 속에 스러져가는 숱한 생명/민중들의 신음소리에 대한 성서적 복음의 필연적인 응답이며 이와 같은 최기저층을 향한 복음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온 세대를 망라하여 보편타당성을 갖는 인류 전체를 향한 복음은 될 수 없다.


    (눅 4:18-19)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한편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과는 거의 상관없어 보이는 바울에 대한 변호도 있어 다행이기는 하다. (예를 들면; 갈릴리 신학대학원의 고 이덕주 교수의 강의, ‘바울의 기독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놓친 부분에 대한 변명까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며 도시민이었고 적어도 그런 점에서 그는 갈릴리의 농민 예수와의 직접적인 공통점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정직하게도 자신의 서신들에서 ‘갈릴리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자신이 해석한 그리스도 예수만을 말한다.


    이는 갈릴리 농민 예수운동을 제국의 그리스도 운동으로 전환시켜 변증해야 했던 바울의 한계로 결국 제국의 기독교 곧 도시 중심의 교회 권력을 출발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하긴 바울이 제국의 도시들이 아니라 농촌의 빈민들을 예수 공동체로 묶어내는 일을 하였었더라면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오늘까지 과연 남아 있게 되었을까? 이는 니케아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권력이 된 배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권력을 쥐고 있던 젊은 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정치권력을 강렬히 지향하는 인물이었고 분열된 제국을 보다 공고한 통일체제로 바꾸어야 했던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선택과 맞물려 유대 갈릴리의 예수는 철저히 배제된 ‘제국의 그리스도’를 공포하는 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 상대적으로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농촌과 도시 변두리 빈민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던 장로 아리우스가 본의 아니게 대변하게 된 예수의 인성을 중시하였던 신앙은 철저히 배제되고 만다. 이미 이단으로 판단된 아리우스의 기독론을 다시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갈릴리의 원 예수’에 대한 접근조차 차단된 이후 신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초월적 기독론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제국주의적 요인들로 인한 폐해들을 깊이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나는 특히 육체노동이 전체 삶을 차지하고 있는 농촌 민중(농민)들에게 필요하고 또 희망이 될 수 있는 복음은 ‘갈릴리의 소작농(peasant) 동네 목수인 예수’가 펼친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고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아리우스가 대변해야 했던 예수의 인성 중심의 기독론을 당시 도시민들의 인구를 능가했던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주시해 볼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


    바울 자신이 처해 있던 정황들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제시하였던 변증을 예수 복음의 진수라고 곡해하고 있는 오늘날의 일부 개신교가 자신들의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정작 갈릴리 농민 예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대 성곽을 쌓으며 ‘천국 열쇠’를 가졌노라고 자처하는 것은 대도시 지포리스(새) 왕궁(둥지) 안의 헤롯 안티파스의 오만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여우)와 그의 도시(여우의 굴)는 갈릴리 예수에 의해 철저히 조롱되었고 무시되었다.


    이는 1524년부터 1525년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농민 대 저항운동’의 폭력성을 비난하며 제후들의 편에 서야 했던 루터의 현실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결국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자신의 루터교회를 지켜내는 정치적 선택을 함으로써 종교상의 결정권을 제국의 제후들과 제국도시 권력이 장악하게 하고, 제후의 영지에 사는 주민(대부분 농민)은 그 영주가 신봉하는 종교를 따르도록 만들고 만다. 시대적인 사회 상황에 미루어 루터를 변호할 수 있겠지만 이는 루터를 비롯한 소위 ‘종교개혁자’들이 정작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며, 본의든 아니든 오늘 우리로 갈릴리 예수가 아니라 로마 시민 바울을 보다 주시하게 만들었고 또한 갈릴리와 유대 민중을 각성시켰던 살아있는 현장의 예수를 자신의 십자가 교의학으로 찍어낸 액자 속의 그리스도로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하기에 또한 이것이야 말로 종교개혁 5백 주년을 이야기하는 오늘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핵심 문제 중 하나라고 본다.

 

2) 그런 면에서 결국 분열로 치닫고만 '16세기 유럽의 일련의 기독교 교회 갱신운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는 명확하다. 그것은 그들에게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없었다는 것이다.

 

    16세기 유럽의 교회갱신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한정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부조리에 대하여 하나의 안티-테제로 바울을 선택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 개신교가 지나치게 신봉하고 있는 ‘종교개혁운동’을 이처럼 상대적으로 그리고 해체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16세기 유럽의 교회 갱신운동에 과연 ‘갈릴리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사라지고 말았는가 하는 흔적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5백여 년 전의 소위 ‘종교개혁’을 다시 논의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가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기독교가 줄곧 추종한 바울의 제국 도시 중심의 교회 건설 운동이 이미 파탄에 이른 오늘날 기독교에 여전한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분열로 실패하고만 16세기 유럽의 교회 갱신운동이 패권적 권력으로 의기양양하던 당시의 교권에 저항하며 실험하던 그 교회가 과연 오늘 우리의 답이 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신학적 고민과 저항적 변증 그리고 실천이라는 갱신의 정신/태도/자세로부터 오늘 우리 현실의 부조리들에 대한 저항과 실천을 위한 영감을 얻는 것이 소위 ‘종교 개혁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도시민 바울’을 넘어서서 ‘갈릴리의 그 사람’에게로 더욱 다가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다름 아닌 '그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을 오늘의 여기에 실천(praxis)해내기 위한 텍스트로 삼고 살아가는 ‘예수의 패거리/갈릴리 파/나사렛 도당(행 24,5/불행(?)하게도 바울행전이랄 수 있는 사도행전의 이 본문은 바울을 그 도당의 우두머리라 한다)’이라면, 선의나마 예수에 덧 씌워진 모든 케리그마들을 최대한 벗겨냈을 때 만나게 되는 갈릴리의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세속화/현세화 운동에 입각하여 소위 기독교 개혁 갱신을 다시 논하는 것이 옳은 자세가 아닐까?

 

3) 이런 이유에서 나는 '16세기 유럽의 교회 갱신운동’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처지와 문제들에 대해 깨어났던 독일 농민들의 대 저항운동과 그들과 함께 했던 소위 ‘종교개혁 좌파’로 일컬어지는 토마스 뮌처 등의 부침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숙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이 한국기독교에서 무속적 성령운동으로만 왜곡된 사실에 비해 토마스 뮌처에게서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혁신하려는 농민 대 저항운동과 함께 성령운동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의 성령운동이 한국 기독교의 무속적 현상과 비슷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로 인하여 독일 농촌민중의 주체적 각성(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각성으로 지나친 폭력으로 치달았다고 해도)이 있었다는 부분은 우리 역사의 동학 농민혁명운동 등으로 촉발되면서 면면히 이어온 민중저항운동들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인다.


    비록 뮌처와 같은 소위 ‘좌파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빈곤하지만 그것은 주류 역사가들의 사시로 인한 것이니 도리어 ‘다시 거룩한 교회’를 이야기하자고 하는 이 시점에 우리가 간과해서 안 될 부분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16세기 유럽의 교회갱신 운동처럼 정작 현장의 민중과는 상관이 없는 교회개혁을 논하는 탁상공론이 되고 그러는 한은 기괴스럽기 짝이 없는 ‘그리스 신전-제국 기독교’의 참람함을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