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우울 그리고 고흐, 키에르케고르, 니체

by 농민만세 2017. 8. 22.

"주기적으로 우울함이 찾아온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울함과 무기력함이다. 대개 한 달의 마지막 주쯤. 평소엔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것들도 마냥 부정적으로 보인다. 또 한 달이 지났네. 돌아보면 한 것은 없고 시간만 흘렀다. 나름 걷고는 있는데, 이게 정말 걷는 게 맞는지 올바른 방향이긴 한 건지 끝도 없는 의심이 가슴을 박차고 튀어 오른다. 매달 마지막 주쯤 찾아오는 이 우울하고 무기력한 나를, 홀로 마주한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늘 긍정적이고 밝을 수 있겠어? 이런 마음으로 그 시기를 견뎌 나간다."

"나를 자극시킬 무언가를 해보기도 하고, 재미있는 것을 일부러 찾아서 보기도 하고. 그러나 한 번 내게 찾아온 그 검고 끈적한 기운들은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이제야 좀 깨달았다.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릴 그 감정들을 먼저 없애버리려고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걸. 그러나 평소에 하던 것들을 평소처럼 하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마음속 동굴에서 '다 싫다!'는 목소리가 메아리쳐도 지금껏 해왔던 것들을 묵묵히, 억지 부리듯이 해야 한다. 그러면 나를 덮었던 무기력함은 서서히 옅어지다 이내 내게서 완전히 떠난다. 마치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조금씩 넓어져 가듯."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동생 테오(Theo van Gogh, 1857-1891)에게 보낸 편지 중 한 대목이다. 고흐의 비극적인 삶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다. 살아생전 그가 팔았던 그림은 딱 한 점. 평생 동생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비운의 화가. 그런 고흐에게 우울함과 무기력함은 한 달에도 수차례 찾아오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고흐는 스스로를 다독인다. 붓을 놓지 않기 위해.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래도 계속 싸워나가야 해.
때가 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1882년 1월 7~8일. <고흐의 편지>, p.195.


그러나 고흐는 절망에 가득 찬 삶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사람이었다. 그의 그림 속 노랗게 불타는 해바라기는 바로 그런 희망을 상징한다. 끊임없이 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해바라기처럼 그도 자기 인생에 언젠가 동그랗게 떠오를 노란 해를 찾아 헤맸다. 1889년 이후 고흐가 찾은 또 다른 희망의 상징은 사이프러스 나무였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 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1889년 9월 7일, 고흐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이 시기 고흐는 넓은 들판에 우뚝 선 초록 빛깔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리며 자기를 짓누르는 부정적인 마음과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일기를 쓴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들판으로 나가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이틀 후 사망했다. 고흐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한 이는 동생 테오뿐이었다. 형이 죽고 6개월이 지난 1890년 1월 25일, 테오도 세상을 떠난다.



원글보기

https://brunch.co.kr/@flthfkd/88

우울증에 관한 새로운 시각

적자생존의 법칙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동물의 왕국에서, 일상에 흥미를 잃고, 사냥의 의지가 없거나,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있고 싶어하고, 식욕이나 성욕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면 , 그 개체의 생존과 번식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따라서 많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우울증”은 진화 상의 역설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을 현대 사회에서 생겨난 ‘현대인들의 정신 질환’이라고 일컫는다. 그런데 우울증에 대한 이러한 판단은 두 명의 과학자를 시작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폴 앤드류와 앤더슨 톰슨이 Psychological Review 에 게재한 논문에 따르면, 우울증은 정신 질환이 아니라, 수십만년 동안 인간의 생존을 도와온, ‘환경 적응을 위한 메커니즘’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과 그 후에 나온 연구를 종합하면 이렇다.

전 세계 사람들 중 30~50%는 일생에서 한 번 이상 심각한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한다. 이는 다른 정신질환의 발병률을 훨씬 웃도는 매우 높은 수치이며, 우울증이 생존과 번식에 방해가 되는 정신 질환이라면, 발병률은 훨씬 낮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울증은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파라과이의 아체족이나, 과거와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쿵족에서도 나타나기 증상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 속 질환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두뇌에는 5HT1A 라는 수용체가 있는데, 뇌에 이 수용체의 수가 적은 쥐는, 우울증 증세가 적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투여하는 항우울제의 경우, 이 수용체를 공략하여 환자의 증세를 호전시키는데, 이는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수용체의 존재 이유가, 우울증 증세를 발발시키기 위함이라는 말이 된다. 자연 선택으로 인해 전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은 어떻게 도움이 되길래 환경 적응의 메카니즘이라고 하는 것일까? 우울함에 잠긴 사람은 다른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자기성찰에 깊게 빠진다. 연구에 따르면, 이런 방식의 성찰은, 다른 외부적 요인을 차단하여,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분석력을 높여준다고 한다. 심지어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순간 우울함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점수가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산만한 생각을 없애고 한 문제에 계속 집중하기 위해선 복측부 전전두엽 피질의 뉴런이 끊임없이 활동해야 하는데, 이 활동을 5HT1A 수용체가 도와주기도 하고,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들로,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며, 섹스에 대한 욕구조차 사라진 이런 상태는, 외부적인 자극을 최소화함으로써, 복잡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상황이 있을까? 아이가 있는 한 여자가 남편이 바람 피는걸 알아냈다고 하자. 여자는 이를 무시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남편에게 자신과 다른 여자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 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남편이 떠나버리기라도 한다면, 애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며, 사냥은 누가해야 하나? 실제로 행해진 여러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우울한 상태에 있을 때 이러한 사회적 딜레마를 더욱 성공적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이러한 증거들이 뒷받침이 되어, 우울증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울증을 정신 질환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하고, 죄책감마저 들게 하여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중 80%는 수치심에 병원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행복하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옳은 것일까?

그리고 기독교에는 

텐트 메이커의 삶을 선택해야 했던 절실함을 무시하고
바울을 말하는 이들

코펜하겐의 거리를 헤매던 우울을 무시하고
키에르케고르를 말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더구나 니체 없는 기독교는 허구다

우울은 우리를 끝내 사람이도록 구원하는
최후의 장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