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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페어 플레이는 아름다워, 나도 제대할 날을 학수고대한다

by 농민만세 2017. 10. 5.

한현희가 이승엽을 예우하는 법

 

8회가 됐다. 이닝 보드가 관심을 끈 이유는 딱 한가지다. 다음이 또 있을 것인가, 아닌가. 그러나 없다. 이미 홈 팀의 승리는 확정적이다(스코어 10-6). 따라서 9회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시간이 됐다. 그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 말이다.



 

첫 타자 강한울이 좌전 안타로 나갔다. 대기 타석의 차례가 됐다. 배트에 끼워졌던 링이 벗겨졌다. 라이온즈 파크를 가득 메운 36번들이 모두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함성들도 함께 기립했다. 핸드폰 카메라의 플래시와 풍선들, 이름과 번호가 새겨진 기념 수건…. 마음에 담긴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사방에서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시울은 이미 벌개졌다. 뭐가 그리 복받치는 지 모르겠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까지다. 뒤에서 지켜보던 아내의 눈가도 촉촉하다. 등장곡 엄정화의 <페스티벌>이 울려퍼졌다. 그가 이 리그에서 50홈런의 시대를 처음 열었던 1999년에 발표된 곡이다.



 

2구째. 빗맞은 유격수 땅볼이 됐다. 강한울이 2루에서 횡사했다. 그리고 1루까지 병살 시도가 이어졌다. 필사의 달리기가 나왔다. 이를 악물고 뛴다. 간신히 세이프됐다. 은퇴 경기에, 그것도 마지막 타석 아닌가. 뭘 저렇게 죽기살기로 달리나. 모양 빠지게시리.

 

너무나 찬란한 게임이었다. 탈락한 두 팀끼리의 대결이었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다. MBC Sports+ 한명재 캐스터의 멘트가 새삼스럽다. “저는 이렇게 멋진 은퇴 경기를 이제껏 본 적이 없습니다.”

 


맞다. 2017페넌트레이스의 마지막 경기는 너무나 극적이었다. 최고의 스타와 이별하는 순간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작별의 홈런을, 그것도 연타석으로 팬들에게 선사할 줄이야. 역시 그다운 헤어짐이었다.

 

그러나 나의 눈길에 자꾸 밟히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건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를 일주하던 전율의 순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빛나는 무대를 위해 기꺼이 그림자가 된 상대편이다. 바로 연타석 홈런을 허용한 히어로즈의 선발 투수 한현희였다.

 

마운드의 투수가 모자를 벗는다. 그리고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고개를 숙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인가. 살벌한 그라운드다. 생사를 건 싸움을 하러 왔는데, 상대에게 예를 갖춘다니. 그것도 아주 깍듯하게.

 

하긴, 처음도 아니다. 지난 봄에도 그랬다. 차우찬의 목례가 있었다. “그동안 같은 팀으로 뛰면서 한번도 상대할 일이 없었는데, 영광이었다. 자동으로 인사하게 됐다.”

 


차우찬이 ‘자기도 모르게’였다면 한현희는 ‘자기도 알게’였다. 미리 마음먹은 행동이었다. 정중한 예의였다. 공손하게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존경을 표했다. 인사를 받은 대선배도 마찬가지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감사의 예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1사에 주자는 3루. 수비 쪽에는 비상 상황이다. 스치면 실점이었다. 아직 0-0. 승부의 기울기가 결정되는 시점이 될 지도 모른다.

 

이윽고 너무나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한현희의 초구는 망설임이 없었다. 147km짜리 빠른 공이었다. 2구째도 비슷했다. 150km였다. 2개 모두 바깥쪽을 향했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다. 문제의 3구째는 148km였다. 존 안으로 들어왔다. 간결한, 그러나 체중이 실린 스윙이 마중 나갔다. 타구는 까마득한 포물선을 그리며 사라졌다. 소름이 끼치는 순간이었다. 캐스터가 딱 한마디를 외쳤다. “보고 계십니까.”



두번째는 3회였다. 스코어 2-1로 홈 팀이 쫓기고 있다. 다시 그의 타석이 됐다. 초구는 역시 148km짜리 직구였다. 외곽으로 약간 빠졌다. 이어지는 2구째는 볼 것도 없다. 이번에는 몸쪽이었다. 149km는 또다시 우측 담장 너머 팬들의 차지가 됐다.

 

빠른 공으로만 5개였다. 한현희가 전설과 두 타석을 상대할 때 던진 공이 모두 그랬다. 다른 건 일체 섞지 않았다. 그건 최고의 예우다. 모자를 벗고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승부 세계의 정중함이 담겼다.

 

직구만 던졌으니 맞춰준 것이라고? 마지막이니 퍼포먼스를 위해 좋은 공 준 것이라고? 천만에, 전혀 차원이 다른 얘기다. 한현희는 최선을 다했다. 가장 강한 공을 던졌다. 다만 평소와 차이는 있었다. 트릭과 기교는 빠졌다. 어줍잖은 유인구는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선수가 떠나는 날이었다. 모두가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만들어지는 곳이었다. 이기고/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현장이었다. 그런 ‘페스티벌’에 가장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바로 정면승부였다.

 

누가 점수를 주고 싶겠나. 누가 지고 싶었겠나.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투수가 되고 싶었겠나. 그러나 홈런을 맞은 그 순간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아주 담담한, 그리고 가장 당당한 얼굴이었다.

 


대선배는 이제 전설이 됐다. 후배 투수로부터 최상의 예우를 받으며 퇴장했다. 그리고 그 후배 투수는 부끄럽지 않은, 오히려 두고두고 자랑스러운 순간을 남긴 역사 속의 한 명이 됐다. 아래 열거되는 투수들과 함께 말이다.

 

1995년 이강철(1호)

 

2003년 이정민(시즌 56호, 최다 신기록)

 

2013년 윤희상(352호, KBO 신기록)

 

2016년 이재우(한일 통산 600호)

 

2017년 한현희 (은퇴경기 연타석)




나도 어서 제대할 날만을 학수고대한다, 그그저 얼른 때려쳐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