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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망각 속에서 건져낸 기억의 파편들

by 농민만세 2017. 10. 5.

망각 속에서 건져낸 기억의 파편들

 

 

보통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언제나 왜곡되고 선택적으로 저장되고 또 재생되기 마련이다. 나는 딸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지만 둘째인 아들아이가 태어나던 일은 마치 뚝 끊어진 필름을 이어붙여 놓은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기억의 파편들을 들추어 보면 마침 경북 문경의 어느 농촌교회로 갑자기 부임하게 되는 바람에 내가 혼자 이삿짐을 싣고 부임하였고 한 두어 달 쯤 후 마침 둘째를 해산한 아내와 신생아 그리고 딸아이를 데려온 것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육군 만기 제대 후 서울에서 혼자 자리를 잡고 사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들이 긴 추석 연휴로 내려왔다. 오랜 만에 온 가족이 모여 옛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근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랜 기억의 파편들이 다시 맞추어졌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이 제대로 재생되지 않을 만큼 경황이 없었던 그 날 하루의 일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맞추어진 그 날의 기억은 마치 온통 하얗게 눈부신 빛 속에 가물거리는 형체들로 조금씩 재생 되었다.

 

 

1986년부터 모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시작된 나의 목회 활동은 1989년 29세의 신학생 전도사(노회의 공식 호칭: 전도인)로 충북 미원면 산골의 산덕교회를 홀로 맡게 되면서 본격화 되었다.

 

 

 

그 때는 딸 아이가 두 살이었고 아들 아이가 만삭인 채 엄마 배 속에서 세상 빛을 보려 하고 있었다. 교회는 아직 기도처로 동네 아이들 열댓 명하고 노인 어르신들 두어 분 그리고 많은 게 부족한 열아홉 먹은 친구 하나가 전부였다.

 

 

 

산골 마을에는 유독 많은 감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서로 혈연으로 이어진 마을 사람들은 '조상 제사 지내지 않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매우 팽배하고 냉소적인 그런 마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중하게 인사하며 마을 어르신들을 한결같이 대하고 동네 아이들을 돌보는 일 뿐이었다. 

 

 

 

교회당은 문 닫은 옛 방아간 옆 낡고 작은 창고였는 데 쥐떼가 들끓었고 조그마한 강단 뒤에 보통 가정의 욕실 만한 공간을 막아 방으로 꾸미고 지내야 했다. 식수가 없어 논가의 농수용 지하수를 사용했는데 농약 냄새가 풀풀 났다.

 

 

 

이삿짐은 청주 부모님 댁에 두고 당장 필요한 것만 가지고 지내야 했지만 순박한 교회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함께 예배하며 지냈던 꿈 같이 짧은 기간이었다.

 

 

 

가까이에는 당시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가 있었고 주변에 경비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그 부대의 대대장과 일반 병사들 그리고 고위 부사관들이 주일 예배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아이와 함께 그렇게 살고 있는 걸 보게 된 그 분들은 일과 후의 휴식과 취침 시간을 쪼개어 교회당 리모델링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밤새 일하고 새벽기도를 마치고 일과에 복귀하는 모습이 한 없이 죄송하고 눈물 겨웠다. 교회당이 산뜻해지고 기거하는 방에 보일러와 욕실까지 설치하자 우리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눈길이 사뭇 달라졌다.

 

그러자 수 년 전부터 교회 폐쇄를 고려하던 노회 관계자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입당식을 앞둔 어느날 생각지 않은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경서노회 지역인 경북 문경에서 목회하고 있던 선배의 전화였다.

 

경북 문경군의 산골에 있는 교회로 부임하라는 것이었다. '어디든 언제든 부르시면 간다'는 모토를 가지고 사는 것이 주의 종된 자의 본분이라고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았기에 마음 속 갈등이 증폭 되었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너무 어려운 이 교회를 두고 갈 수는 없겠노라고 말하려 전화를 걸었는데 전날까지 아무일 없던 전화기가 온종일 불통이었다. 공중전화를 하려면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일단 교회당 입당식을 마치고 전화하리라 생각하고는 금요일 오전에 예정된 행사 준비에 전념했다. 행사를 마친 그날 밤, 전날부터 종일 분주하게 일한 탓이었는지 아직 해산 예정일이 남은 아내의 상태가 갑자기 심상찮았다.

 

청주에서 택시를 불러 부랴부랴 부모님 댁으로 가서 쪽잠을 청하며 밤을 지샜다. 그야말로 아내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일,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1월 10일 토요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산통이 시작되었다.

 

아내는 칼로 도려내듯한 통증을 참느라 작은소리로 간간히 비명을 질렀다. 청주시 인근 농촌교회에서 목회하던 큰형님 부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타고 오신 택시를 그대로 잡아놓고는 형수님과 함께 아내의 내복을 가방에 담았다. 

 

엉금엉금 기는 아내를 택시에 태우고 청주시 보건소의 '모자보건센터'를 찾았다. 먼저 딸아이를 해산한 곳이었고 임신 중 필요한 검사들을 하느라 자주 찾은 병원이었다. 당시 아빠들은 복도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두세 시간 쯤 지나서 형수님이 해산실에서 나왔다. "아들이예요! 축하 드려요! 다 건강해요!" 일순 긴장이 풀려 안도감이 밀려와 병원복도 나무의자에 비로소 주저 앉았다. 어제 이후 황망히 떨리던 가슴이 울컥했다. 

 

일단 집 어르신들께 알리려 공중전화를 거니 큰형님이 전화를 받았다. "문경 교회에서 이삿짐을 실러 화물차를 가지고 오셨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이 경황 없는 중에, 더구나 토요일인데? 아내와 아기 얼굴도 아직 못 봤는데?! 당시는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걸 어떻게 하겠니? 너라도 먼저 가야지... 오라 하시면 가는 게 우리 아니냐?"

 

형님의 침착하지만 안타까운 목소리가 전화기 속에서 웅웅 거렸다. 일단 서둘러 집에 도착해 보니 교회에서 오신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벌써 짐을 들어내 싣고 있었다. 아이고. 점심 때가 한참 지나서 겨우 이삿짐 트럭을 타고 교회에 있는 남은 짐을 마저 실러 출발했다.

 

함께 계셨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화물차에 오르기 전에 큰형님이 나와서 배웅했다. "다 나한테 맡기고 너는 걱정 마라. 너를 불러 가시는 분께만 집중하고... 여기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할께..."

 

전에 없이 형님의 목소리와 얼굴이 비장했다. 내가 정말이지 무엇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상황, 이제 막 해산한 아내와 아가의 얼굴도 못 봤는 데, 할머니 손을 꼬옥 잡은 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딸아이를 껴안고 눈을 마주했다.

 

"아빠가 이삿짐 얼른 옮겨놓고, 승연이랑 엄마랑 아가 데릴러 올께! 알았지?" 다짐을 하고는 화물차에 올랐다. 혹시 전쟁 나던 날이 이랬을까? 산덕교회에 도착했더니 이삿짐 차가 들어오는 것을 본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왔다.

 

그동안 몹시 핍박하고 냉소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교회 전도사가 이사 오는 모양'이라고 환영하려는 것이었다. 도리어 짐을 싣고 떠나는 걸 보고 너무나 어이없어 했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 교회는 다음 날인 주일, 예배를 어떻게 드렸을까. 

 

그리고 늦은 밤이 돼서야 겨우 경북 문경군 중평리 산골의 교회에 도착했다. 가로등 하나 없이 캄캄한 산골 마을이었다. 교회당 진입로가 좁아 마을 입구 꽁꽁 언 논에서 화물차를 돌려 세웠다.

 

이삿짐을 내려놓을 공간을 두느라 한 바뀌 빙 도는 화물차의 헤드라이트에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그 어둠 속 추운 날씨에 온 교인들이,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들과 유치부 아이들까지 전부 나와 기다리고 서 있었다.

 

환히 비추는 자동차 불빛을 도움 삼아 모두 달려들어 이삿짐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나의 두 번째 임지의 사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추운 교회당에서 매일 기도로 지내시는 권사님이 삼시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다.

 

그렇게 한두 달을 지내고는 그 교회 출신인 읍내 교회 장로님의 승용차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러 청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 코가 오똑하니 엄마 닮은 아기를 덮은 작은 하늘색 이불이 눈부셨다. 어린 딸아이는 작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무릎 위에서 좀처럼 잠 들지 못했다...

 

"아니에요!" 아내가 웃으며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한 달이 아니고 겨우 두 주간이었어요!" 흠~ 사람의 기억이란 건 정말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리고 그처럼 정말이지 경황이 없는 상황들, 무슨 일이든 사전에 계획을 다 세우고 나 스스로 예측 가능하게 만들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던 나의 어리석은 기질로 감당키 쉽지 않았던 그런 일들은 나의 목회 사역 내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