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앉았는데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작년 이맘때 초계국수 할 때도 같은 패턴이었다. 생각보다 재료를 다듬고 절이고 짜내고 양념하고 국물을 내고 식히는 과정이 오래 걸린다. 어떤 이들은 내가 요리의 고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저 인터넷 요리 - 검색을 통해 간단한 조리법을 찾아 흉내내는 수준 - 일 뿐.
그러고보니 9월이면 열린밥상도 거의 3년이 되어간다. 알지 못하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만만치 않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조금 더 영리해진 부분은 있다.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힘을 덜 쓸지, 돈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매 번 들어가는 돈은 줄어들 줄 모른다. 잘 못하는 밥, 재료라도 풍성하게 하자는 취지에서다. 덕분에 맛없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밥상은 푸짐하고 볼 일이다.
오늘 예배 본문에는 쉼을 갖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등장한다. 그런데 결국 쉬지 못하시더라. 잠시 갖는 안식이 결코 사치일리 없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냥 두지 못한다. 배타고 가는 동안에는 좀 쉬셨을지. 우리 가족은 이른 여름에 보통 하루 정도 휴가를 다녀오는데, 이번에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날을 놓쳤다. 쉼이 필요한 게 우리 자신이라는 걸 깨닫고도 잠시라도 쉬지 못하는 건, 우리가 위대한 혁명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도처럼 덮쳐오는 어둠이 느껴져 앞으로 달음질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며칠 전까지 여러가지 옵션을 손에 두고 가늠하던 참이었다. 지난 번 인상깊게 보았던 당진에 가볼까. 제주는 연세이고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던데 제주에 가볼까. 태백에 선한 것이 있다는데 폐특법 사라지기 전에 태백으로 옮겨볼까. 어디든 달려들면 뭐 굶기야 할까. 혹은 여기만 못할까. 그런데 이런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 저기서 신호가 들어온다. 마을의 이웃들이, 센터 선생님이, 얼벗들이 도대체 주저앉으려고 하는 엉덩이를 뻥하고 차준다.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가 왜 여기에 보내졌는지 간신히 기억해냈다. 아, 우리 먹고 살려고만은 아니었구나. 혼자가 아니구나. 좀 더 견뎌보라는 익숙한 신호에 우리는 또 남은 힘을 내어 몇 걸음 더 가게 되겠지.
나는 아버지의 50대 중반까지의 삶만을 경험했다. 아버지는 그 때까지도 모든 일에 열심이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수첩에는 껌 500원, 자장면 3000원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렇게 아끼고 또 아끼면서도 정작 아버지는 쉼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 돌아가시던 날에도 교회 청년부 수련회 답사를 다녀오셨더랬지. 갖지 못한 우리네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여호와의 집에 이르러서야 참된 안식을 경험하게 되는건가. 소박하나마 나는 좀 다른 삶도 경험해보고 싶은데 말이다.
몰디브에 가고 싶다.
아직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인간적으로다가 좋은 마음 드는
한 페친 목사님의 글
맨 위의 그림은
부활하여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초상
그는 죄인처럼 복종하시고 아들로서 승리하셨다
그는 종처럼 복종하시고 왕으로서 승리하셨다
그는 증언하시는 이로서 자신이 증언 되셨다
찬미 예수 그리스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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