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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숫타니파타, 원시 싯달타-운동

by 농민만세 2018. 8. 7.

 

숫타니파타

 

 

52.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 바람과 태양의 뜨거움, 모기떼와 독사들, 이런 모든 것들을 참고 견디며,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3. 어깨가 딱 벌어져 연꽃처럼 늠름한 거대한 코끼리가 그의 무리를 떠나가고 싶은 대로 숲 속을 노닐 듯,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4.연회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잠시 동안의 해탈에조차 이를 겨를이 없다. 태양의 후예(홀로 깨달은 나)인 나 싯달타가 하는 이 말을 명심하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5. 서로 다투는 철학자들의 논쟁을 초월하여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수행자는, "나에게는 지혜가 생겼다. 이제 누구에게도 다시 이끌려가지 않으리라"고 자신을 다지면서,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6. 탐내지 말라. 속이지 말라. 갈망하지 말라. 잘 보이기 위하여 자신을 가리지 말라. 혼탁과 미망을 벗어던지고, 세상의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7.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을러빠진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8. 배운 것이 풍성하며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그런 고매하고 명민한 친구를 가까이 하라. 그러한 사귐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나니, 모든 의혹을 잘라 버리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59. 세상의 유희나 오락, 또는 쾌락에 젓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이끌리지 말라. 몸의 장식을 벗어버리고 꾸밈없는 진실을 말하며,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60.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재산도 곡식도, 친척이나 그 외의 모든 욕망까지도 다 버리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1.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3. 자비와 평정과 연민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를 따라 익히고, 세간(世間) 모든 것을 저버림이 없이,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74. 탐욕과 혐오와 미망을 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다 끊어 버리라.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말고, 저 광야를 가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홀로 가거라.

 

-숫타니파타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

 

 

 

잠 못 드는 사람에겐 기나긴 밤이요,

지친 나그네에겐 머나먼 길이요,

불멸의 길을 찾지 못한 저 어리석은 이에게는

너무도 길고 지겨운 이 삶이요,

이 기나긴 삶의 여행 길에서

나보다 나은 이나 나와 동등한 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외롭지만 차라리 홀로 가거라.

 

저 어리석은 자는 차라리 그대 길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백 년 동안을 무의미하게 사는 것 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여기

명상과 축복 속에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니르바나, 저 불멸을 알지 못한 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만이라도 여기 니르바나,

저 불멸을 깨닫고 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법구경

 

 

(이상,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와 '봉은사 법회 강의'에서 인용)

 

 

 

 

 

참 놀랍게도 우리의 <교회 이전의> '큐복음서'처럼 <불교 이전의> '숫타니파타'나 '법구경'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는 절집에 앉아있는 수행자나 탑 숭배 이전의 불교의 모습이 있다. 숫타니파타 속의 싯달타는 어떤 특수한 종교의 개조라는 자의식이 전혀 없다. 그냥 사람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진솔하게 말하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불교 특유의 전문용어가 거의 전무하다." (도올, [도마복음한글역주]에서 인용~)

 

사람들의 종교적 야욕으로 금칠되지 않은 싯달타, 불교가 승단의 조직을 구비하게 되고 교리화되고 권위화되기 이전의 '싯달타-운동'을 보이는 것이다.

 

타산지석,

사람들의 종교적 야욕으로 금칠되지 않은 예수, 기독교가 교단의 조직을 구비하게 되고 교리화되고 권위화되기 이전의 '예수 갈릴리-운동'이, 우리의 이 모든 일의 해답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에게 이는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십자가의 신학과

부활의 신학조차 앞서는

성육신 신학과 민중신학 속에

그리고 미션얼쳐치운동으로

줄곧 지속되어 온 일

이제는 마땅히

21세기 인류에게 구원이 되는

기독교회복운동으로!

 

그런데,

원시 예수 갈릴리운동에서

그는 거의 행동뿐

말은 투박하리만큼

지나치게 소박한 농부의 언어!

와우!!!!!!!! 찬미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