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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교회와 협동조합

교회에서 협동조합 만들기 2

by 농민만세 2015. 9. 11.

교회에서 협동조합 만들기?! /2

2. ​교회와 협동조합 (2)

​교회에서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사실 요즘에만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됩니다만, 저의 모 교회인 농촌교회에서도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던 일이 있고 지금껏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용협동조합은 금융 관련업무에 한정된 협동조합 운동입니다. 말하자면 다수가 작은 힘들을 모아 서로를 살리자는 것으로 이 또한 매우 성서적인(? 물론 다른 종교 분들은 석가 부처님이나 공자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회 운동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2년에 발효된 '일반 협동조합 법'에 의한 협동조합은 신용협동조합과는 반대로 '금융' 관련 업무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협동 사업이 가능한 형태의 협동조합입니다. 그러고 나는 바로 여기에서 성서의 가르침 곧 기독교 사상의 사회적 구현을 위한...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복음의 실현', 주기도문의 '이름-나라-뜻'이 말 그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를 말로 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삶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하나의 결정적인 복음 운동 중의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관련하여 <협동조합의 유래와 역사>를 가장 잘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게시물을 하나 링크하겠습니다.


http://jisiks.com/10143900895

나는 다음 몇 가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야말로 기독교회가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실현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지켜내면서 사회에 기여하기 위하여 대단히 결정적인 신앙 운동이라고 봅니다.


첫째는 그것의 대안 정신입니다. 위에 링크한 내용에서 매우 잘 알 수 있는데, 극도로 비인간화 되는 근 현대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들에 단순히 저항하거나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려는 실천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이루어내는 위대한 과정을 이미 역사 속에서 증명해 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그것의 자발적 협동 정신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부패하여 하나의 사회 악이 되었던 시기를 살펴보면 소위 일반 신자들이 자발성을 잃었던 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맹종/맹신이야말로 종교를 가장 추악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공통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힘을 모아' 그것을 타개해 나가려는 자세야 말로 성숙한 시민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조건 어떤 초월자를 의지하게 만들려는 종교야말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마입니다.


셋째는 그 구성원들의 주체적 참여 정신입니다. 공동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자세야말로 성숙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종교는 자칫 사람을 매우 이기적이고 자기 편향적인 인간으로 왜곡시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든 그것의 옳고 그름은 바로 여기에서 판가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독실하다고 자신들이 평가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떤 모양으로든 편협하다면, 그리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면 적어도 그 기독교는 기독교 본래의 가치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면 틀림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 적어도 성서적인 교회라면 이래야 한다는 나의 오랜 목회관으로부터, 그리고 목사는 그런 교회가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돕는 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는 오랜 생각으로부터, 지금 현재 처한 지역사회와 또 우리교회의 매우 유별났던 지난 역사를 통해서 더더욱 나는 이를 실천해 내야만 한다는 어떤 속절없는 과제를 스스로 안고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2012년 '일반협동조합법'이 논의되고 그 해 12월에 공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대단히 고무되었고, 지난 만 2년 동안 교우님들이 질리도록 협동조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왜 협동조합을?!하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저 목사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목사님은 그저 내가 필요할 때 심방이나 와 주고, 기도나 해주면 되지, 교회는 그저 빠지면 께름칙하니까 다니는 곳이지, 교회 일은 그저 목사님의 일이지. 더더구나 목사님은 하늘의 대행자?!이지(뜨헉!)... 뭐 이런 식인 교우님들의 생각을 바꾸기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협동조합 창립총회를 하겠다고 공고하고 미루고, 또 공고하고 미루고를 여러번 반복하다가... 지난 겨울을 지나면서 2015년에는 내가 진짜로 망하든 어떻든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을 하면서... 드디어 30여 분이 협동조합 설립 동의를 해 주셨고, 지난 1월 2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서류를 만드는 일이 만만치 않아서 충남사회경제네트워크의 협동조합지원팀의 조언대로 우선 최소한의 인원을 조합원으로 하고 시작합니다.

실제로 농장을 개인 돈(안해님이 대출받아 준)으로 임대하고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농기센터 농업대학에 등록하는 등의 일이 병행되었고, 어렵사리 준비한 서류들로 드디어 설립신고를 마칩니다.


이사장이라고 해 봐야 협동조합의 전 업무를 담당하는 심부름꾼입니다. '간인'을 저렇게 잘못 찍어서... 또 무엇 때문에, 또 뭐를 빠뜨려서... 나중에는 결정적으로 법인 인감을 내려고 새겨간 '직인'이 너무 커서.... 정말 셀 수 없이 여러 번 왔다갔다를 반복하여 겨우, 법인 등록을 마칩니다. 그 오랜 기간동안 인감도장을 맡겨두셨던 교우님들이 참 고맙고 대단합니다. 교회라는 것이 거의 일주일 단위로 만나고 업무가 진행되는 곳이기 때문에 다들 농사 일로 생업으로 정신없는 분들이라서 한 없이 기간이 늘어졌습니다.



사업자 등록을 하는 과정에서 이사회 의사록에 주 사무소 임대차 계약을 명시하지 않은 것, 매~우 구체적으로 사업의 종류를 명시하지 않은 것​, 그리고 법인 등록을 할 당시에 출자한 조합원 명부가 아니라 그 이후 늘어난 조합원 명부와 출자 상황을 제출한 것 등으로... 하루에 네 번! 읍내를 들락거렸고, 마지막에는 세무서 직원 분이 지처서, 아예 손을 놓고 한 40분 기다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ㅡ,ㅡa


어쨌든 위 사진에 보이는 대로, 협동조합의 명시된 목적에서 '자주적, 자립적, 자치적인 활동....' 나는 이 부분에서 늘 가슴이 뜁니다. 그게 바로 교회여야 한다고 여기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사에 적응을 아직도 잘 못하시는 교우님들이 있어 한편 죄송하기도 하지요ㅡ,ㅡ


이제 남은 일은 온라인/통신 판매자 등록하는 일하고, 신용카드 결재 사업장으로 등록하는 일 등이 남았습니다. 물론 제대로 하나의 법인체로 시작된다는 의미이고, 정말이지 생소하기 짝이 없는 사업체 경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며, 앞으로 이루어나아가야 하는 숱한 일들(변할 수 없는 신분인 한 사람의 신학도로서의 개인 연구, 앞으로 발생할 각종 공사들, 아직은 보잘 것 없지만 재무 회계 등등)은 물론 농삿일에, 조합원/교우님들을 깨워내야는 일에, 무엇보다도 '자발적이고 성숙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나는 끝까지 밑바닥에서 견뎌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다가 실패로 돌아가고 빚더미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탈출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이 그처럼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던 '시나이 산, 야훼 축제'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물론 성서에서는 그것을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다고 평가하지만 그들은 분명 '금송아지'가 아닌 '야훼님'을 대상하고 있습니다(그게 잘한 일이라는 건 물론 아닙니다). 사실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 자발적인 축제를 엄히 금지하고 엄격한 종교 규례들을 적용시켜냈던 '모세/율법 종교'의 영향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신약성서로 오면 '사도행전의 처음교회'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어쩌면 당시 혁혁한 교회 지도자들의 대단한 카리스마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에 나는 썩 그렇게 신명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좀 엉뚱한가요? 하지만 우리 교우님들이 과연 그렇게 주체적으로 깨어난 민중(아, 이 말에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말 개역성경에도 신명기, 여호수아 그리고 마태복음 등에 나오는 용어이니까요...)이 될 수 있을 그 날을, 그렇게 이 교회 공동체를 함께 가꾸어갈 그 날을 속절없이 열망합니다. 그런 교회 공동체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이번 태안농업대학 10기에서 만난 정말 좋은 많은 분들 중 한 분은 이를 '대동세상'이라고 하시더군요~

(마 14: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民衆)이 저를 선지자(先知者)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보십시오. 이것이 민중의 힘이었거든요. 지금 나는 굳이, '나의 가슴을 언제나 벅차게 하는 예수님'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 이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우리교단 제 100회 총회(청주 상당교회당) 현장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목회 박람회'에 <예장 마을만들기 네트워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제 1번 부스에 당첨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교회들, 그것도 농촌교회를 불러내서 이야기를 듣자고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세월이 바뀌긴 바뀌고 있나 봅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