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이쯤에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문제의 발단은 이것이었다. “나는 왜 농목(農牧)으로 사는가?” 다시 말하면 ‘나는 왜 굳이 농목으로 살게 되었나?’ ‘나는 왜 다른 목사들이 거의 가지 않는 이 길을 가고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였다. 내가 지금껏 감히 목회자로 봉직하고 있는 교회와 이 교회가 있는 주변 사회적 환경이 나로 그리 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는 것. 물론 이 말은 내가 이렇게 농목으로서 남달리 고달프게 살고 있는 책임을 교회나 주변 지역사회에 돌리겠다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목회자들에게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삶의 방식이라는 말이다. 정말 ‘보내어진 자’라면 누군가 ‘보내신 이’의 의지와 의도에 충직하게 그리고 ‘보내어진 곳’의 형편과 사정에 매우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자신의 소명을 다해야 하니까.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이미 20대 후반부터 농촌교회에 봉직하며 살아온 나로서, 어쨌든 우리교회와 우리 지역사회의 형편은 크게 당혹스러운 것이었고 어디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교회가 지역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으며 온갖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는 곳에, 어쨌든 나는 ‘보내어졌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의 의지를 실현해가야 하는 것이 내가 사는 목적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그야말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농촌 지역에 소외되어 있는 아이들과 노인들의 삶이 우선 개선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고,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계속하여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지역사회의 인식을 지속적으로 바꾸어내야 했다. 물론 교회 내에서는 수많은 기도회와 성서 읽기를 통해 교인들의 신앙을 제고시키고 최소한 교인으로서 교회와 마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말이지 처음부터 기초부터 전부 다시 놓도록 해야 했다.
물론 그 일은 지금도 전혀 쉽지 않은 일이고 교인들도 아마 적잖이 힘들었을 것이다. 소위 묵은 교인들이 어이없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결단코 멈추어서 안 되는 일이었다. 그들을 견디다 못해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만 새 교인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다른 데로 가시면 안 되나요? 이 교회는 안 돼요.” “처음 이 교회 다닌다고 하니까 마을 친구들이 ‘너 그 교회에서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그랬어요.”
사실 나는 이 말이 지금도 가장 아프고 솔직히 겁이 난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지만 교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외부의 사회적 자산에 눈을 돌릴 수밖에. 마을로 직접 나아가기 위해 농사를 지었고, 협동조합을 어렵게 만들어 사회적기업에 도전했고, 다시 폭을 넓혀 귀농귀촌인들과 연대해 보려고, 나는 목회자 아닌 선교사로 탈피하여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미련스러운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자꾸 새삼스럽다.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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