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하기야 교회에 모여서 소원을 빌고 기도 응답도 또 위로도 받고, 마음에 평안도 얻고, 하느님의 복을 받을 만큼 훌륭한 교인이라고 칭송해 주길 바라는 것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겠는가. 그리고 교회로 불러 모으신 이가 따로 계시니, 말로만 아니라 정말로 그분의 의도를 따르고 그분의 의지에 충실하게 교회를 이루며 가자고 촉구하고 목사가 두 팔 걷어붙이고 앞장서는 일 또한 그리도 잘못된 일이겠는가.
결국 이는 애초부터 한국교회가 ‘교회론’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부메랑이니 누구 탓을 하랴. ‘기도 응답을 척척 받아 만사형통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속고 속이며 교회를 대기업으로 일구어낸 자들에 의해 우리의 복음이 전혀 잘못 알려진 덕분에, ‘교회에 그렇게 오래 다니는데 어째서 그렇게 몸이 아프냐, 나이 먹은 아들은 장가도 못 가냐, 우환을 벗어나지 못하냐’고 아픈 말을 해대는 지역주민들은 또 무슨 잘못이겠는가.
다만 그들처럼 배포 있게 과대포장 못하고 자신은 뭐든 다 믿는 것처럼 속이지 못하면서(그렇게 해서라도 교회 부흥 좀 시키지 왜 남들 다 하는 걸 못하냐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놀랍지만) 진작에 그만두지도 못하고 여전히 목사로 살고 있는 내 탓일 수밖에.
하지만 지금 남아 계신 교우님들과 장로님들이 이렇게 ‘사회적 기업’을 교회가 먼저 협동조합으로 일구어 지역사회에 본이 되자, 무조건 교인들 끌어 모으는 일보다 어려운 지역사회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일이 예수님의 교회다운 일이라고 같은 마음들이니 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무슨 일이든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대단해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이 과연 우리의 텍스트인 성서적으로 그리고 또 신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근거 있는 것인가를 줄곧 고려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교(敎)인 이상 그 모든 일은 다 허무한 일이 되고, 더구나 무슨 성공을 거두었다 할수록 그 일은 도리어 우리와 우리의 교회를 망치는 위험한 일이 된다.
이런저런 마음으로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던 갈릴리신학대학원 박사원을 찾았다. 다음은 당시 제출했던 입학지원서이다. 내용이 꽤 길지만 그대로 실어 보겠다.
<아래와 같은 사유로 ‘갈릴리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지원하여 성실히 연구에 임하려 하오니 입학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본인 스스로 채울 수 없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 목마름은 1985년 신학도로 첫발을 내디디며 접하게 된 비평학적 성서연구와 현대신학적 사유들, 특히 민중신학의 치열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보수적인 현재 소속 교단의 평범한 목회자의 길도 쉽게 저버릴 수 없기에, 그와 같은 저의 고민과 목회 현장의 조화는 지금도 크나큰 과제입니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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