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 장로가 나서서 돈을 교회 계좌에 넣었으니 확인하고 자동차 서류를 넘겨주라고 했다. 자동차를 사고파는 경우, 매입자가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작성하여 시군구청에 제출하고, 매도자는 자동차 원부와 몇 가지 서류만 건네주고 돈만 받으면 된다.
입금 여부를 확인해 보니 당시 폐차 가격으로 받으려던 60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 가격에 사겠다는 것이었으니 ‘아마 수리비가 더 나올 수 있다. 괜찮겠냐?’고 물어보았지만 뻘쭘하니 서 있는 그 사람은 얼굴이 벌게져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냥 ‘예. 예.’ 할 뿐이었다. 건네주는 서류를 받는 그의 손이 웬일인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제 관련 서류는 다 넘겼고 자동차 매각비도 교회 계좌에 잘 들어왔으니 우리로서는 더는 신경 쓸 일이 없는 터였다. 그런데 교회당에 잘 자라고 있던 느티나무와 주목을 갑자기 웬 인부들이 와서 ‘누구누구가 파가라고 했다’면서 장비를 들이밀지 않나, 외제 차를 몰고 온 무슨 회장이라는 이를 데려와서 몽산포 해수욕장에 청소년 수련관을 지을 테니 내가 전에 시무하던 대도시 교회들을 소개해 달라지를 않나, 하도 많은 일을 겪은 터라 줄곧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공연한 의심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폐차 직전의 승합차를 굳이 사 간 것도 이상했고, 심지어 혹시 무슨 범죄에 이용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확인도 되지 않은 일로 공연한 의심병에 걸려 지내지 말고 아예 확인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군청 민원실을 찾아갔다. 그 승합차 번호를 적어내고는 ‘자동차 원부’ 복사를 신청했다. 잠시 후 건네받은 서류를 보고는 정말이지 나는 어이없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승합차는 180만 원에 동남아시아 어디로 ‘수출 차량’이 되어 팔려나간 것이었다. 아이고, 참 세상을 살면서 배울 일은 끝도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알았다. 그러니까 교회 장로라는 이가 자기 교회 승합차를 몰래 해외로 팔아 120만 원을 챙긴 정황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당시 우리가 교회에서 받던 생활비는 월 85만 원이었다. 그때는 또 이웃 교회 부지매각 건으로 난리가 났었기에, 그 서류를 딱 들이밀고 이실직고하게 만들지 못했고 그 자동차 원부는 온갖 다른 서류들과 함께 고이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 내가 시무했던 교회의 여전도회에서 ‘목사님 생활비로 쓰라’고 신신당부하며 1년 동안 월 15만 원씩 보내기 시작한 지원금으로 그 120만 원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다 채워 넣어야 했다. 어쨌든 나는 교회의 재정과 비품 관리의 최종 책임을 진 담임목사로서 내게도 일련의 책임이 없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웃지 못할 일은 아동보호센터 어린이-청소년 공부방을 운영하면서도 몇 번 있었다. 당시 공부방에 매일 오던 키 큰 중학생 남자아이가 지금도 생각난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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