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교회나 교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가장 우선하여 망설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쏟아부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것이 썩 잘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누구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도울 때는 그 대가를 전혀 한 점도 바라지 않고 해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하는 것 같다.
그 아이가 자라서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의 무슨 꿈도 도전도 없게 보였고, 앞으로 무얼 하고 싶냐고 물어봐도 그냥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의욕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여 일단 무슨 일에든 자신감을 느끼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어보니 그래도 부모의 도움으로 자동차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해서 교회 승합차로 운전 연습을 나가 보았다. 교회 집사님이나 또 다른 청년들에게도 교회 승합차로 운전이 숙달되도록 여러 번 해왔던 일이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틈나는 대로 여러 번 자동차 통행이 별로 없는 천수만 방조제를 지나 홍성이나 천북면 쪽으로 나가보았지만, 움찔하고 심장 놀랄 일도 몇 번 있었는데 여간해서 운전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러기를 두어 달, 그렇게 소비된 연료비도 사실 적지 않았지만 한 번도 교회에 청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교회나 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은 돌고 돌아서 결국은 우리 귀에까지 들려오는 법, 여러 번 겪은 일이었지만 우리는 자칫 또 한 번 마음에 큰 시험이 들뻔했다. 그렇게 운전을 가르치고 무엇이든 도와주려는 것을 마치 내가 교회에서 꽤나 아이들을 부려먹으려는 것(?)이지 않냐는 식으로 엄한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유독 이곳에서 겪은 이와 비슷한 일은 여럿이었다. 교회당을 좀 아끼고 관심 갖도록,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모둠 활동하는 것도 인성교육에 아주 좋은 일이라서, 종종 교회당 꽃밭을 가꾸거나 간단히 무엇을 고칠 일이 있으면 물론 간식이나 점심값이 더 나갔지만, 아이들을 불러 일을 시켜보곤 했다. 하다못해 망치나 톱질이라도 좀 하게 해 보았다.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지만 결국 그런 일들도 내가 그동안 아이들한테 잘해준 것이 다 그렇게 교회 일에 부려먹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냐는 말로 돌아왔다. 물론 모든 부모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 후로 나는 어차피 마을에 아이들도 청소년들도 거의 사라진 차에 청년 사역까지 그냥 다 접어 버렸다.
‘등가 교환’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의 법칙이 아니던가. 어떤 일에든 대가 없이 누군가 헌신하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값을 치르는 것 아니던가. 교회를 봉사할지언정 무엇이든 그 혜택을 볼 수는 없다는 나의 이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아내나 아이들의 미래가 그만큼 희생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중 일이지만, 이런 나를 처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목회자의 전형이라고 몰아세우는 교인도 있었으니 이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한 일이었던지.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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