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증상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르고
저항력이 약한 노약자들에게 특히
치명율 높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회적 물리적 거리두기가 최고의
이웃사랑, 이웃에 대한 배려가 된
인터넷 온라인 사이버 시대가
급속도로 다가와 문을 열고 있다
선택의 여지없이 준비 되지 못한
이들을 다시 대거 소외 시키며
또 다시 세상은 몰아쳐 급변하고
여전히 꿈 속을 헤매는 교회는
소리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밤낮으로 노동하는 바울파 전도자나
뻔뻔한 교회사업가들만이 살아 남는다
이 절실한 백주 대낮 다메섹도상에
엎어져 봐야 '예수 그 사람'를 만난다
설교라는 거 그만 두고 이제는 좀
살자, 내 구원을,,, 이렇게 된다
지역교회들을 결국 모두 흡수하는
인터넷 방송사 대형교회가 출현한다
벌써 약은 돈주들은 바삐 움직이고
자기 본연의 메시지가 뭔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갈 이유도 필요도
깜깜했던 기존 기독교의 종점이다
페스트의 창궐로 중세의 종말과
근현세의 시작이 왔듯, 걷잡지 못할
신종 바이러스의 주기적 대유행은
무엇의 종말이고 무엇의 시작일까
다시 한 번의 인문주의 르네상스일까
비이성적 미신적 종교들의 창궐일까
분명한 것 하나는 말재간 기독교와
감상주의적 내면화 자기 합리화의
나르시시즘적 신앙행태가 심화될 터,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지역교회들은
그 명맥마저 철저히 사라져 버리겠지
그러니 제대로 된 무교회주의 신앙,
곧 '삶의 신앙'을 집중 고려할 때다
일상 언어로 기독교를 번역하고
자신들의 말로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다만 지역선교 공동체로,
목사들은 자비량 지역사회선교사로!
지금까지의 모든 패러다임을 버려라
그동안 믿은지가 얼마인데 아직도
유치원 초중고등 아이들이란 말인가
졸업시켜 사회로 좀 내보내라, 그런데
갈릴리 예수님의 반제국 대안운동
마을 곧 지역사회 공동체 운동은
아직 유효할까 그것은 가능한 걸까
소규모 예수 따름 공동체 교회는?
더구나 예수님 스피릿을 삶으로
함께 이야기할 사람들은 과연 있을까
세상을 충분히 구해 나갈 수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전파하지 않으니
바이러스들이 스스로를 전파하는구나
그런데,
동의를 강요하는 기독교와
교묘한 미디어의 속성은, 처음부터
그렇게 소름 돋을 만큼 닮아 있었다
아래 미디어의 5가지 필터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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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춈스키의 "(매스 미디어에 의해)제조된 동의"
Noam Chomsky - The 5 Filters of the Mass Media Machine
https://youtu.be/34LGPIXvU5M
According to American linguist and political activist, Noam Chomsky, media operate through 5 filters: ownership, advertising, the media elite, flak and the common enemy.
Noam Chomsky / 미디어는 소유권, 광고, 미디어 엘리트, 집중포화, 공통의 적 등 5가지 필터를 통해 작동한다.
#AlJazeeraEnglish #MediaTheorised #TheListening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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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acebook.com/1048338975/posts/10219996693321506
/ 김선주 목사(길위의교회)
< 새로운 교회가 오고 있다 >
전에 내가 출연했던 모 기독교 방송사의 PD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회들, 특히 작은 교회들을 위해 영상예배 자료를 제공하고 제작해 주겠다는 것이다. 참 감사하고 귀한 일이다. 어떻게든 이 위기 속에서 교회를 살려보겠다는 그 생각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이면을 생각해 보았다.
코로나 사태로 교회들이 영상예배를 하게 되면서 이제 교인들이 사이버교회와 영상예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시대가 올 것을 방송사들이 눈치 챈 것은 아닐까? 역동적인 만남과 사건 중심의 교회 공동체를 대체할 새로운 교회 사업모델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처치의 시장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벌써 시작된 것은 아닌가? 나의 느낌적 느낌이다.
방송과 사이버 공간의 예배는 이미 꾸준히 진행 되어 왔다. 설교와 찬양 중심의 기독교방송 프로그램들이 교인들의 일상에 젖어들었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예배당 예배와 일상에서의 방송예배가 병행되고 있었다. 다들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우리 안에 두 개의 교회가 공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극동방송의 소위 전파선교사 모집은 기성교인들을 방송이라는 무형의 교회로 흡수하여 막대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로컬 처치에 쏟아야 할 헌금과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방송사가 흡입한 것이다. 그것을 교회라는 부르지만 않았을 뿐, 사실은 또 하나의 교회였다. 김장환 목사가 담임하는 극동방송교회.
오륜교회에서는 매년 11월마다 다니엘기도회라는 프로그램으로 이미 미디어예배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미국의 TV설교자들도 있다)전국 아니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해마다 예배를 공유하고 있다. 대형 TV세트를 전국의 미자립교회에 뿌려 교회들을 자신의 방송 프로그램 안으로 흡수하고 있다. 또 방송화면의 상단에 헌금계좌를 걸어놓고 노골적으로 헌금을 유도하는 모습에서 극동방송의 또 다른 행태가 보인다. 자본과 미디어를 소유한 집단이 교회를 통제할 수 있고 그것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컬 처치의 기능은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교회도 미디어 자본의 논리와 구조 아래 편입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코로나 사태는 기존교회에서 영상예배와 영상설교를 공식화함으로써 기독교방송사들은 더 적극적인 교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과 미디어를 소유할 수 있는 오륜교회와 같은 메가처치의 영향력이 매우 커진 것이다. 이런 교회는 미디어를 통해 교회 시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사이버처치와 영상예배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면서 방송사들과 메가처치의 영상예배가 기존교회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코로나19로 로컬처치의 붕괴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통교회가 무너진 자리에 방송사들과 메가처치의 미디어와 프로그램이 밀고 들어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셀레오쿠스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제단을 세웠을 때 유대 종교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였다. 나는 불경스럽게도 자본과 미디어가 교회를 잠식하는 것을 보면서 세계 정복자 로마 황제들의 성전 유린을 떠올리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는 역동적인 만남과 사건 중심의 전통교회와 영상예배를 방송 프로그램으로 전파하는 사이버 처치로 양분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과 미디어가 만드는 새로운 질서에 편입하지 못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점점 사리지고 말 것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들은 오륜교회의 다니엘기도회에서 이미 그 전조를 보고 있었다.
거대한 사이버처치에 맞서 로컬처치의 생명을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그 힘에 무릎 꿇고 항복하여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으며 생존할 것인지, 코로나 이후의 목회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새로운 교회가 오고 있다. 새로운 예배가 오고 있다.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목회자도 교회도 방향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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