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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갈릴리 밥상 공동체]

제 1 장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 선교 - 1.3. 1.4.

by 농민만세 2020. 7. 15.

 

 

[ 제 1 장 / 1.3 우리가 경계하는 것들 / 1.4 우리가 주시하는 것들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1.3. 우리가 경계하는 것들

   이처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마을 곧 지역사회로 나아가 마침내 그 울타리를 걷어냄으로써 ‘마을을 교회 삼고, 주민을 교우 삼는’42) 그야말로 선교와 목회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일에 도전하는 목회자와 교회가 되기 위하여 논자와 한마음교회가 계속하여 나누고 있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이다. “지역사회에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교회 되기!” “자식들한테 자랑하고 지역주민들이 참여하고 싶어 부러워하는 교회 되기!” “아예 ‘마을 활력소’라는 간판으로 교회 간판을 바꿔 달기!” “그래서 마침내, 교회의 형체는 버리고 지역사회의 틈새로 소금처럼 녹아들어 사람 사는 맛을 냄으로써 우리가 사는 어디든 교회이게 하기!” 그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동안 좌절과 패배감에 사로 잡혀있던 교인들은 이제는 이에 상당히 근접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를 좀 더 고무시키기 위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선교적 목회 일들에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명실상부 마을 전체를 ‘회복된 마을공동체’로 아우르게 하는 ‘마을교회’를 추진해 나가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우리 스스로 줄곧 경계하여 온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1.3.1. 초월보다 내재(內在)

   한마음교회는 하늘과 땅이라는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반 성서적 사고를 경계한다. 장신대 한국일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교회의 선교적 입장으로 ‘하느님 나라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임하는가를 말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극단적인 입장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느님 나라를 영적이고 개인적 실존이나 또는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현실로 이해할 때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이나 역사와 무관하며 교회가 현실에 참여할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한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어떤 제도나 정치 형태와 동일시 할 경우 하느님 나라의 초월성과 종말론적 완성의 여지가 사라진다. 후자가 하느님 나라에 대한 현실 참여적 급진주의적 입장이라면, 전자는 현실 도피적 보수주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개인의 영적, 내면적 차원에 속한 비역사적, 비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반대로 세상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 실현되는 역사 내적인 정치 현실도 아니다. ‘예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는 개인적이고 내면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며, 현세적이고 역사적이면서 동시에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이며 역사 초월적이다.”43)

  여기에서 논자는 특히 ‘예수의 말씀과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라는 대목에 방점을 둔다. 그리하여 한마음교회는 대단히 모호한 그리고 남들이 거의 고심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말해 온 ‘기독교의 초월적인 언어’들을 막연히 흉내 내서 이야기하지 말고, 그에 반하여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 ‘내재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모호할수록 우리의 신앙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경계했던 비 현세적인 것이 되고 그것은 또한 나아가 반사회적인 것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브로커, 매개자, 거간꾼들 곧 ‘기도하고 예언해 준다는 무당 목회자’를 필요로 하게 만들어 교인들을 교회 안에서 더욱 객체화 또는 종속화시키는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로써 예수에게로 집중하여 나아가야 하는 본연의 일에 혼란이 가중되고, 반사회적이며 탈(脫) 현실적인 무교(巫敎)적 현실 부정이라는 반 기독교 신앙을 심화하기 때문이다.

  한마음교회는 우리말 개역 개정판 성서에서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둔 복음서의 ‘귀신’이라는 용어를 특히 배제한다. 그것은 사실 성서 헬라어 본문에서 오직 한 군데 거라사 악령 이야기에서만 인격이 있는 표현으로 자처할 뿐44) 복음서의 다른 모든 본문에서는 남성이나 여성 명사가 아닌 중성 명사로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남과 자신에게까지 해코지하는 ‘악마적 영성(靈性, Spiritual)’ 곧 ‘그런 삶의 태도, 관습, 풍토, 영향력’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자칫 토속 종교의 ‘귀신’과 혼돈하지 않게 한다. ‘이미 땅의 사람인 예수’께로 전적으로 집중할 시간도 우리에게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가 예수와 예수의 일에 집중되고, ‘예배가 우리의 삶을 예수에게로 조율(tuning)하는 일’45)이 되도록 계속 고심하며 노력한다. 홍정수 교수는 「홍정수 신학 쪽지 - 에레모스 28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신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말하는 이 마당에서 내가 꼭 남기고 싶은 말: ‘내 생애 전부가 내가 받드는 주님의 가치관에 조율돼 있어야 한다.’ 사람이신 예수를 깊이 알면 우리는 예수와 함께 춤추고 애곡하게 된다. 또 저주하게 되고 (본질로부터 벗어난) 성전 안에서 난동 부리게도 된다.”

   논자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46)고 하는 민중교회 목회자이며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마을목회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부천 새롬교회 이원돈 목사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하느님의 초월성은 민중 안에 감추어져 있는 메시아성을 수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역동화시키는”47) 한에서 그러하다. 역시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초월성이 인간이 세운 모든 악마적 지배구조의 우상성을 타파하고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민중을 선택하고 민중을 역동화, 동태화(動態化)시키고 있는 것”48)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동의하는 우리 땅의 변혁을 운동하고 있는 초월이며, ‘화육하여 함께 거주하는’(요 1,14) 하나의 기능적 초월이고, 논자가 한마음교회와 함께 갈망하는 내재적 초월 또는 현세적 초월이다.

   이러한 ‘내재적 신비주의’ 또는 ‘내재적 초월성’에 대한 인식은 지역사회가 자신을 스스로 치유하는 마을로 변혁시키려고 도전하는 선교적 목회 활동가들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최한구 교수는 책 『마틴 부버의 생애와 사상』에서 부버(Martin Buber)의 ‘신비주의의 세속화(世俗化)’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신비주의는 종교 행위로서 건전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비주의 종교란 매일의 일상생활을 건전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일상생활과 종교 생활을 구분케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의 진리와 신비를 생활 속에 찾으려 하지 않고 항상 비정상적인 종교활동 속에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거룩이 있기 때문에 종교의 목적은 우리의 평범한 생활을 성결케 하는 것이다. 종교는 신비적이지 신비주의는 아닌 것이다. (...) 부버 역시 인간의 삶에 성속의 구별이 없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일상생활을 이분법화(dichotomy) 하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서 통전적(wholistic)이었지 흑백논리 같은 이분법은 주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부버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를 읽고 나서는 (...) 종교적 행위 속에 있는 힘과 창조적 생동감보다는 오히려 매일의 생활 속에 영원성의 생동감이 가득 찬다는 것을 중시 여겼다.”49)

1.3.2. 굴종(屈從) 아닌 주체적 실천

  승자 독식, 제국주의적 패권주의 악마를 경계하면서 한마음교회는 혹시라도 우리 내부의 사고나 추구하는 일들 그리고 실천하고 있는 모든 사역에 깃들 수 있는 성공지향적 욕망들이 오히려 그 과정 중에 있는 본연의 가치들을 잠식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누가 누구를 이끌고 따르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각자 생산적이고 사회 공동체적 활동을 하는 주체들로써 서로 연대하는 집단 지성을 형성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평생토록 거의 한 번도 ‘창조적 주체자’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농촌 장ㆍ노년의 교인들, 특히 그런 여성 교인들을 어떻게 주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서게 도울 것인가를 중점 과제로 삼는다. 본래 전업 농민의 삶이 그러하다. 자신이 투자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직접 생산한 농산물 가격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없는 사회적 경제적 구조 아래 평생을 살아온 농민들이다. 더구나 그런 농민의 내조자로서 수동적이어야 했던 농촌의 장ㆍ노년 여성들은 안타까울 만큼 객체적이고 타율적이다.

   하지만 성공회대 권진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안병무의 말대로 민중은 가능성과 초월의 살아있는 존재이므로 민중을 담론과 이야기의 언어로 다 말할 수 없다. 특히 언어(담론과 이야기)가 갖고 있는 제한적 성격 때문에 살아있고 가능성과 초월의 존재인 민중을 우리의 언어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우리는 민중을 언어로 곧 이야기(사회 전기)와 담론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민중이 언어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뛰어넘음, 곧 초월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예수와의 상관관계로부터 온다.”50)

  논자는 한마음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기대를 멈추지 않는다. 지난 17년을 돌아보면 물론 일취월장한 바가 없지 않다. 권사들을 근 1년 이상, 오후 찬양 예배 시 구역예배 교재를 가지고 설교단에 올라 20분 정도씩 직접 설교를 하도록 하였다. 노회와 시찰회의 여전도 연합회 또는 남면 지역의 여전도 연합회 임원으로 활동하도록 독려하였고 마침내 그들 중 3명의 여성 장로들을 장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당을 이전하는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 교회와 지역사회에 수십 년 동안 물의를 일으켜온 은퇴 장로가 수시로 공사 현장에 드나들면서 작업에 전념하고 있는 목수들이 원성을 높일 만큼 어이없는 간섭과 시비를 또 시작했다. 이전 교회당을 매각하여 공사 대금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새 교회당을 마련하고 이어 리모델링 공사를 하면서 수시로 임시 제직회를 열어 시시콜콜한 모든 일을 함께 의논하며 진행했더니 도리어 그것을 시빗거리로 삼았다. 그동안 개척 교인이라는 그릇된 자부심으로 교회를 좌지우지하던 그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고성을 지르며 회의를 진행할 수 없도록 의사를 방해하였다. “이 제직회와 함께 지금까지 결의한 모든 내용과 당회의 결의사항들을 인정할 수 없다면 당회와 교회 자체를 부인하는 게 되는 겁니다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그들로 인해 제직회가 혼란 중에 마무리되었고 바쁜 일이 있다는 교인을 먼저 교회 승합차로 귀가시키고 교회당에 돌아오니 공동 점심 식사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알고 보니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참아 왔더니, 우리를 너무 우습게 안다. 이 교회를 너희들만 세웠냐?’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분란에 한 말씀도 하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그들에게 몰려가셨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찾아가 보니 이미 한바탕 야단을 치고는 지팡이를 짚고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이 그들로 한마음교회를 자진 이탈하게 하여 수십 년 만에 드디어 평화로운 교회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권진관 교수는 이런 사람들을 “실재의 민중 곧 살아있고 가능성이며 자기 초월적인 존재인 민중”51)이라고 한다. 비록 사회적으로 주체적이지 못해 시름과 원망 속에 평생을 산 전업 농민인 남편들의 일방적이고 고집 센 주장과 결정들에 대하여 평생을 문맹(文盲)으로 수동적이며 복종적으로만 살아왔으나, 결국에는 이처럼 새로운 세계를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민중이었다. 논자와 한마음교회는 마가복음의 ‘오클로스’, 어디든 예수를 따라다니며 예수를 중심으로 모이고 또 이동하며 예수와 함께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마가복음 민중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읽고 이야기 나누고 있다. 이것이 자신들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반복해야 하는52)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년 전 당회를 새로 조직할 때부터 장립한 여성 장로들에게 장로는 목사의 보조자가 아니며, 독립 치리회(治理會)인 한마음교회 당회의 일원으로서 교인들을 대의(代議)하는 주체적인 직분자가 되어야 진정한 자립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독려하고 있다. 주일예배도 ‘주체적인 예수의 민중’으로서 함께 완성해 가는 예배가 되도록 고심하며 기획 실천하고 있다. 말씀 예전은 집사들과 함께, 이어지는 성찬 예전은 최대한 장로들과 함께 집례함으로써 그들 고유의 직무와 소명이 드러나도록 배려하고 있다.

1.3.3. 남의 이야기 아닌 우리 이야기

   권진관 교수는 책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자』에서 ‘인간의 모든 삶과 경험은 이야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하기’는 정신적인 동물인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고 사람은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삶과 세상을 표현하는데, 사람은 이야기 속으로 태어나서 이야기 속에서 살며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함으로 인간의 삶은 언제나 이야기체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상화된 이론이나 분석의 이성적 언어는 인간의 슬픔, 아픔, 사랑을 담아내거나 표현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언어는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담아낼 수 없고, 시간성 속에 있는 삶과 경험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53)

   하지만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언어들을 보면 그것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상징적이고 추상적이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자신을 변증하기 위해 또는 자신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속한 세계의 언어들로 번역해온 지난 역사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대단히 무지하였고, 처음 기독교가 전파될 때 번역한 1백 년이 넘는 언어들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마치 그것으로 자신들의 교리가 수호될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여전히 범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세계 또는 삶의 현장들과 분리된 ‘기독교어(語)’를 그 의미 한 번 고심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그것을 성공적으로 습득한 이들이 ‘믿음 좋은 교인’으로 인정받게 하였고, 결국은 그 신앙의 양태가 일상의 삶과 괴리되는 것을 당연하도록 하여 마침내 교회 안팎에서 온갖 문제들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게 하였다.


  한마음교회로 새 출발 하기 전인 ‘남면교회’의 진기한 모습 중 하나는 예배 중에 시무장로나 은퇴 전도사가 ‘대표기도’를 하면 원주민으로 오래 살아온 교인들은 모두 눈을 뜬 채로 앞에서 ‘청산유수같이 기도하고 있는 이들’의 표리부동한 모습을 노려보며 입을 비쭉이고 있는 풍경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좁은 지역사회에서 모두 드러난 이율배반적인 그들의 속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에 대한 오랜 분노와 실망이 한계치에 이르러 있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독실한 교인으로 외식(外飾, ‘υποκριτης - 전문 배우들의 연기)하는 모습을 경멸하면서 그들의 입에 발린 ‘기독교 용어들’ 말하자면 하느님, 은혜, 기도, 응답, 믿음, 구원 등과 같은 용어들 자체에 대한 거부감까지 상당한 것이었다. 이에 논자는 한마음교회의 남은 구성원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들을 자신들의 일상어로 말할 수 있게 하고, 마침내 그것이 ‘우리의 예수 이야기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한 사건을 일으키는’ 동인으로 촉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2016년 신동리교회 오필승 목사는 마을 이장으로서 마을 노인들의 ‘자서전 쓰기’를 실시한 적이 있다. 홍성군 평생학습센터의 지원을 받아 자원하는 10여 명의 마을 노인이 모여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口述)하도록 도왔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한 맺힌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때는 다소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일로 자기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민중 특히 농촌민중이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먼저 가질 수 있어야 또한 자신을 용기 있게 객관화시킬 수 있다. 이를 촉발시키기 위해 논자는 여러 설교 유형 중에 특히 ‘이야기 설교’와 ‘설화체 설교’를 포함하는 ‘서사설교(敍事說敎)’에 집중하고 있다.54) 서사 설교는 성서 속의 사건들을 오늘 우리가 손에 땀을 쥐며 ‘아하! 경험’을 하도록 책과 문자들 속에 갇혀 있는 성서의 사건들을 오늘 여기의 생생한 사건이 되도록 이야기 언어로 살려내어 청중이 실시간 참여할 수 있게 돕는다.

  한마음교회가 위치한 남면 지역사회는 논자가 목사 안수를 받았던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서의 경험에 비하면 23년 전인 그때보다 문맹(文盲)률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는 사실에 놀랐다. 몇 차례 지역사회 선교활동의 하나로 ‘어르신 한글교실’을 실시한 바가 있는데 매번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 이후 지역 농협에서 또 초등학교에서도 한글교실을 열었지만, 본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자신의 이름이나 읍내에서 버스를 탈 때 필요한 ‘남면’이라는 지명 등 몇 가지 외에는 받침 없는 낱말을 이해하는 수준 이상의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심지어 50~60대의 장년 중에서도 문맹인 주민이 상당수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그들에게 한글을 몰래 배워보자고 몇 번이나 권유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런 마을 주민들이 교회와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교인들은 전부 교회당에서 책을 꺼내놓고 예배한다’는 것이다. 이이런 이유로 앞으로는 성경책은 집에 두고 읽고, 교회당에서는 우리의 예수님을 이야기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1.4. 우리가 주시하는 것들

  그러면 각자의 다양한 선교적 현장에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이정표와 희망이 될 만한, 다른 이들의 고민과 도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논자와 한마음교회가 주시하면서 우리의 지역사회 속에서 변주(變奏)해 낼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하느님 나라 운동들은 무엇이 있는가? 먼저 그런 운동들의 동인이 된 오늘의 한국교회 한계상황을 간략히 살펴보자.

1.4.1. 한국교회의 한계상황

  한마음교회가 소속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P.C.K.) 제102회기 총회장인 최기학 목사는 총회의 주제를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요 3,16-17)로 정하였고, ‘마을목회’를 그 중심 주제로 제시하면서 급변하고 있는 시대 속에서 한국교회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복적 신앙과 이원론으로 진단한다.

   “하나는 기복신앙이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가르쳤다. (...)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잘살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사라졌다. 기복신앙이란 복을 받기 위해 신앙을 기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을 받으면 신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원론(二元論)이다. 교회는 성(聖)과 속(俗)을 철저히 구분하여 세상과 교회를 분리시켰다. 이 이원론이 세상은 교회를 적으로, 교회는 세상을 적으로 생각하는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게 했다. 이원론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자처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담을 쌓아 교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101회 총회는 이런 교회의 모습을 탈피하여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해 ‘다시 거룩한 교회로’를 주제로 정했다. (...) 교회의 본질은 세상 속으로 가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55)

   정대위 교수는 “과연 기독교는 한국인을 변화시켰는가?”라는 글에서 초기의 한국 개신교의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감정적이고 열광적이었다는 서양인들의 목격담을 인용하면서 무교(巫敎)적인 엑스타시가 우리 민족의 기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이렇게 논한다.

   “3ㆍ1운동 때 우리나라를 잠시 방문한 바 있는 신문기자 맥켄지(Mackengie)는 그의 『자유를 위한 투쟁(Fight for Freedom)』에서 그는 우리 선배들이 토론하는 열정적인 애국 연설의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썼다. 그보다 10년 앞서 1908년대에 우리 교회가 한참 부흥 운동에 들떠 있던 때에 방문했던 YMCA의 존 모트(John R. Mott)(56a)도 우리들의 이러한 다이오니시안적인 기질을 목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질과 기세를 보고 이대로 나간다면 ‘한국은 비기독교국들 가운데 첫 번째로 기독교국이 될 것이다’고 예언 비슷한 이야기를 한 일도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웅변의 설득력이란 정밀한 이론의 전개보다는 오히려 외치는 목소리의 높음과 책상을 두드리는 비분강개한 태도를 통해서 전달되는 감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문화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무교(巫敎)적인 종교적 전통인 ‘열광하는 강신’(降神, Seance)의 엑스타시가 모두 이러한 우리 기질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56)

  물론 ‘기독교의 무교적 신앙 양태’에 대한 경계는 무속신앙이 가지고 있던 선 기능들, 예를 들면 민중의 애환이나 한(恨)에 대한 심리적 상담(相談, counseling), 해소(解消, solution) 또는 정화(淨化, katharsis)의 기능 등 선 기능 전체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속신앙의 역기능적인 부작용들 곧 그것의 반사회성, 무윤리성, 엑스터시 몰입 등 비현세적, 무이성적, 비과학적 요소들 그리고 대상을 더욱 객체화시켜 종속시키는 무속신앙의 폐해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무속 신앙적 양태들은 급속히 한국교회로 그대로 유입되어 교인들을 하부 계층으로 구조화시키는 제국주의적 성공주의 욕망과 맞물려 오늘에 이르렀고, 이로 인한 한국교회의 한계상황은 이미 알려진 대로 사회적으로 큰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끝도 없이 제 몸집을 키우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기를 쓰는 대형주의교회 방식을 너나없이 지향하는 한국교회의 쇠락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이미 3백 년 전에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도려내듯 예언하였다. “세간의 눈에 특정 종교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대체로 이 종교가 기울어 가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57)

   한국기독교연구소 김준우 소장은 ‘<21세기 기독교 총서>를 발간하면서’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의 위기상황의 심각함을 역설한다. 한국 갤럽의 ‘1997년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1998)에 따르면, 한국의 비종교인들은 전체 인구(18세 이상)의 53.1%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이들 비종교인들 가운데 과거에 개신교 신자였다가 비종교인으로 이탈한 사람들이 73%(불교 23.6%, 천주교 12%)에 이른다는 것인데, 특히 젊은 층과 고학력자 가운데 개신교를 이탈하여 비종교인이 되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택할 경우 선호하는 종교는 불교 40%, 천주교 37%인 반면, 개신교를 택하겠다는 사람은 22%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어 한국교회가 21세기에는 유럽과 미국의 많은 교회처럼 심각한 쇠퇴의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이런 우려스러운 현상은 다음과 같은 원인에 기인한다고 말한다.58)

   “한국 개신교회가 이처럼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의 종교적 요청에 대해서조차 충분히 응답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비종교인들로부터 가장 호감을 얻지 못하는 종교가 된 직접적 원인은 오히려 교회 내부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곧 위의 갤럽 조사에서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참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 확장에 더 관심이 있다’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79.6%에 이른다는 사실은 위기의 원인이 교회 자체 안에 있음을 보여준다.”59)

1.4.2. 패러다임의 전환

   「예장뉴스」 편집장 유재무 목사는 이와 같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 시점에 대하여 이제는 ‘목회 패러다임’ 자체의 전환이라는 한국교회의 시대적 과제가 이미 임박해 있음을 이렇게 지적한다.

   “한국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효과적으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위한 선교하는 교회로, 마을의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교회 형태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마을공동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제 목회의 패러다임은 전환되어야 한다. 더 이상 성직자 중심, 교회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 세상, 마을을 우리 목회와 선교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일찍이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말하기를 ‘이전에는 교회나 사람이 선교했지만 이제는 하느님이 이미 거기에서 역사하시고 고난받고 계시다’고 하였다. 이제 마을목회는 바로 그것을 인식했고 과거의 목회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60)

   ‘흩어지는 교회론’의 J. C. 호켄다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가 메시야의 성취에 대하여 언급할 때 주요 관심사는 ‘세계’를 위한 하느님 나라이다.”61) 또한 “교회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 중의 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62)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기중심적인 교회론 곧 교회 자체를 목적화 하고 교회의 양적 팽창을 교회의 존재 이유로 내세우며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가 교회의 목적과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준엄한 촉구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호켄다이크는 이 평화에 대한 세 가지의 차원을 말한다.

   “이 평화는 첫째, 선포(kerygma)되어 진다. 설교 속에서 그 평화는 실제적인 의미로 표현되고 현재적인 것이 된다. 선포는 평화가 도래했다는 선포이다. 둘째, 이 평화는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친교(koinonia) 속에서 생동한다. 친교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평화가 현재적인 것임을 나타낸다. 셋째, 이 평화는 겸허한 봉사(diakonia) 속에서 실증된다. 봉사는 평화를 겸손한 예배의 언어로 바꾼다.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선교 사업에 통합되어야 하며 세계는 지금 바로 이 포괄적인 선교를 요청하고 있다.”63)

   논자는 여기 호켄다이크의 말 중에서 ‘설교, 선포’를 “우리의 예수 이야기하기”로 바꾸어 읽는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가 도래했다는 선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친교’는 “밥상 공동체의 실천”으로 읽는 데 그것은 교회를 안과 밖으로 나누는 울타리를 제거하여 모두에게 열린 갈릴리 예수의 밥상이다. ‘봉사’는 우리가 성만찬의 순환적 화육(化肉)으로 보는 “세상의 소금 되기” 곧 ‘이미 결정화 된 소금이 세상 속에 재 용해되기’로 읽는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목적과 목회 패러다임 자체의 대전환은 최근 들어 강력한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응답으로는 ‘작은교회운동’과 ‘마을목회운동’ 그리고 최근 들어 더욱 급속히 퍼지고 있는 자비량(自備糧, tentmaker) 목회자 운동인 SNS모임 ‘일하는 목회자들’을 들 수 있다.

1.4.3. 작은교회운동

   ‘작은교회운동’은 「생명평화마당」(공동대표 : 박득훈 방인성 이정배 한경호)에서 2013년 10월에 개최한 ‘2013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교회 박람회 : 작은교회가 희망이다!’ (2017년부터 ‘작은교회 한마당’으로 개칭)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당시 생명평화마당은 2013 작은교회 박람회의 취지문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교회 박람회를 개최하며’라는 글에서 현 한국교회의 상황을, ‘목사의 크기는 교회의 크기에 좌우한다’는 말이 통용되는 가슴 아픈 현실에 직면해 있으며 이에 ‘이념과 신화’로 전락해버린 한국기독교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한국 사회 전반에서 제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더 이상 교회가 예수의 생명 평화 정의의 길을 따르는 참 제자의 모임(Sanctorum Communio)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치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작은교회운동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생명평화마당은 올해 10월 열릴 WCC부산대회와 2017년으로 다가온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작은 교회가 희망이다’라는 화두를 내걸고 대안적 가치를 추구하는 작은 교회들의 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 한국 사회가 초대형교회들의 존재 양식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예수 정신에 입각한 작은 교회들이 모여 기독교의 존재 이유를 한국 사회에 새로운 방식으로 천명할 목적에서이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 작다는 것은 숫자적 의미보다 대안적 삶의 물음과 더욱 직결된 사안이자 주제이다. 이것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 한국교회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가 되었음을 직시한다. 목사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 자존감을 교회의 크기에서 찾기보다 예수 정신의 유무, 즉 사회 및 자연에 대한 우환 의식에서 보려는 첫 시도인 것이다.”64)

1.4.4. 마을목회운동

   ‘마을목회운동’은 지난 2015년 5월 19일, 충남 홍성군 신동리의 이장이자 신동리교회의 담임목사인 오필승 목사의 제안으로 이원돈, 유재무, 김규복, 김영철, 이 진, 송기섭, 정진훈 목사 등이 신동리교회당에서 “(가칭) 예장 마을만들기 네트워크(예마넷)” 창립을 위한 첫 번째 준비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공동대표를 맡은 이원돈 오필승 목사를 선두로 초청하는 전국의 노회와 목회자 모임들, 타 교단의 모임들을 다니며 ‘마을목회’를 확산시켰다. 1차 ‘마을목회 이야기 한마당’을 개최하였고 전국마을만들기네트워크 전국대회, 100회기 총회 목회박람회, 장로회신학대학 사역박람회, 작은교회 박람회 등에 참가하면서, 2016년 치유와 화해를 위한 ‘지역ㆍ마을목회 컨퍼런스’에서 참가자 일동 명의로 「마을목회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2016년 12월 8일에 2차 ‘마을목회 이야기 한 마당’을 개최하면서 예장마을만들기네트워크(예마넷, 상임대표:오필승)는 창립총회를 마치고, 총회 농어촌선교부와 함께 교단 산하의 전국 신학대학교를 순회하면서 ‘마을목회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마침내 총회장 최기학 목사에 의해 102회기 총회의 주제로 채택되어 ‘마을목회운동’은 마침내 전 교단적인 운동으로 확산하게 된다. 이에 부산장신대 황홍렬 교수는 ‘마을목회’를 다음과 같이, 보다 실질적인 사역과 실천적 입장에서 정의하고 있다.

   “마을목회는 목회자가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를 넘어 교회, 기독교 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마을 주민들과 마을공동체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다양한 모습 -마을을 살리는 학교, 마을기업, 마을을 살리는 문화, 생태 마을, 마을을 살리는 생활 정치 등- 으로 돌보고 섬겨 하느님 나라를 마을에 이루는 하느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목회를 가리킨다. 마을목회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기도, 안식일, 안식년, 희년과 성만찬이다.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는 교회의 본질로서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선교가 있고,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일치, 하느님의 선교, 정의로운 평화, 생명 선교, 에큐메니칼 영성 등이 있으며, 종교개혁신학으로 칼뱅의 경제이해(재화, 노동, 임금)가 있다.”65)

   그런데 대구기독교협의회 회장이며 영남신학대학교 은퇴 교수인 정경호 교수는 지난 2017년 3월 24일 영남신학대학교에서 모인 ‘제101회기 2차 총회 마을목회 세미나’의 주제 강의에서, 이와 함께 ‘마을목회운동’이 보다 근원적인 입장에서 스스로 상실하지 말아야 하는 정체성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마을목회 운동이 제각각 자신들의 주장과 목소리를 내는 많은 교회 갱신운동 중 하나가 될 것이 아니라 ‘중심부를 변혁시키는 주변부의 운동’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경호 교수는 벨 훅스(Bell Hooks)가 『여성운동의 이론 :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Feminist Theology : from Margin to Center)라는 책에서 ‘종래의 여성운동(feminist movement)이 백인 중산층 이상의 지식인 여성들이 펼치는 여성운동이었고 남성에 의하여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해방을 강조하는 운동이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남성에 의한 착취와 차별에 대한 여성해방은 물론 경제적 가난과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흑인 여성의 눈에서 여성해방을 외치는 여성운동(womanist movement)의 이론을 주창하였다고 소개한다. 그리고 벨 훅스는 이 책을 통해서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라고 하는 ‘주변부(margin)’의 흑인 여성들이 삶이 안정되고 존중을 받으면서 생명이 풍성한 해방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중심부를 변화시키고 건강한 사회가 되게 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제창하였다고 한다.

   정경호 교수는 이 주제 강의 결론부에서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책으로 드루신학대학원 이정용 교수가 1995년에 저술한 “마지널리티”(Marginality)를 제시해 주었다. 이 책에서 이정용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주변성의 극치’요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변성의 공동체’이라고 강조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도는 ‘하느님의 새로운 주변부 백성’이며 오늘의 교회와 세상을 창조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주변성을 통한 주변성 극복’이라고 강조한다66)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주변성은 휘황찬란한 도시 곧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이라 말할 수 있는 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변두리이기에 이를 마을로도 대치해 볼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심이라고 하는 대도시의 거대한 교회 그룹들이 한국교회의 생명을 살리고 변혁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대도시에서 밀려난 작고 초라한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곳을 새롭게 하고 그 마을을 살려가는 목회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중심부에 자리한 병든 한국교회와 좌초 전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치유하여 하느님이 바라시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당시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있는 주변부의 백성이 되어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이룩해 나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역사임을 알 수 있다.”67)

  정경호 교수가 소개하여 준 이 ‘주변부의 신학’은 오늘날 마을 곧 지역사회의 그늘진 곳으로 나아가 마을운동가 또는 사회적 해결사 등으로 활동하게 되는 선교적 마을목회자들을 크게 고무시켜주는 신학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알아서 몰려드는 중심부인 대도시의 큰 교회들보다 떠날 사람들은 이미 다 떠나고 남겨진 우리 사회의 주변부 농촌과 중심부 도시의 또 다른 주변부인 작은교회 목회자들이 발견하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주변부의 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자구책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마을목회운동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마음교회와 같은 농촌의 작은교회들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교인을 도시로 이주시키고 남은 '주변부의 주변부'에 있는 교회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자신의 날개가 타 없어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불길 속으로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로마의 권력과 영화를 추구하느라 유대와 갈릴리 농촌 지역의 마을공동체들을 사실상 초토화시키면서 대 헤롯을 본받으려 기를 쓴 헤롯 안티파스처럼 끝이 없는 중심부만을 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주변부에서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변혁을 꿈꾸며 실천하는 마을목회자들에게 정경호 교수가 적극 추천하고 있는 이 책에서 이정용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맺는다.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주변적인 존재이다. (...) 중심을 추구할수록 신적 현존에서 멀어지며, 지배를 추구할수록 다른 사람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 주변부 사람에게는 고통이 기쁨보다 의미 있고, 사랑이 권력보다 중요하다. 주변부 사람은 기쁨 속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권력에서 사랑을 추구한다. 기쁨과 고통뿐 아니라 권력과 사랑도 분리할 수 없기에, 주변부 사람 역시 중심부 사람과 분리할 수 없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궁극적인 승리는 중심부 사람을 주변부 사람으로, 주변부 사람을 새로운 주변부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주변부 백성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주변부 사람이 될 때, 모든 사람은 모든 종(從)의 종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종이 된다.(마 20,28; 빌 2,5-11) 서로에게 종이 됨으로써 슬픔의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되고, 두 세계 사이에 있는 사람은 두 세계 모두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바뀐다.”68)

1.4.5. 일하는 목회자들

   ‘일하는 목회자들’이라는 SNS 모임은 2016년 7월 서울 송파구의 함께심는교회 담임목사이며 생명나무 마음치료센터 원목인 박종현 목사에 의해 만들어진 ‘일하는 목회자들’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69)의 개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교회의 목회만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어서 부득불 생활 현장으로 나가면서도 그것이 또 하나의 약점이 되기에 소속 교단이나 교인들에게조차 떳떳이 이야기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다. 박종현 목사는 ‘「일하는 목회자들」을 열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모임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일하는 목회자들, ‘이중직 목회자’로 불리며, 대부분의 교단에서 교회법상 불법으로 분류되는 이들, 사람들은 우리더러 ‘믿음이 없는 자’, ‘소명이 부족한 자’ 심지어 ‘목회의 열의가 없는 자’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목회자들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질 수 없는 사회경제구조 아래, 이중직이 옳은가 그른가는 둘째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저 스스로를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할 뿐입니다. 아니 실은 목회를 하기 위해 생존하려는 것뿐입니다. 최근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지만, 그저 논의의 대상일 뿐, 도우려는 이도, 도울 방법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하는 목회자들’은 (...) 우리 스스로를 돕는 플랫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 여러분이 겪은 일터의 현실을 나누어 주십시오. 자신에게는 지나간 일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 경험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70)

   “우리는 그저 스스로를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 할 뿐입니다. 아니, 실은 목회를 하기 위해 생존하려는 것뿐입니다.” 박종현 목사는 이렇게 한 사람의 목사로서 남다른 소명을 실천해 나아가야 하는 엄정한 현실 속에서 다른 어떤 목사들보다도 더 절실하고 치열한 자리에 있는 목회자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목회사회학연구소」에서는 지난 2014년 10월 20일, "목회자의 이중직, 불법에서 활성화까지" 세미나에서 이렇게 논하였다. 

   “한국교회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자립 작은교회 목회자들은 직접적인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4월 월간 ‘목회와 신학’과 목회사회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조사해서 발표한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한국 교회 목회자의 66.7%는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4인 가족 월 최저생계비인 163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자의 73.9%는 생계유지를 위해 이중직을 찬성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들의 이중직은 대부분 불법이다. 왜냐하면, 많은 교단이 목회자의 이중직을 불법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71)

   또한, 논자는 지난 2014년 12월, 「예장뉴스」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그 어떤 문제보다 시급하게 다가와 있는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를 단순히 목회자 가정의 생계비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우리 사회를 향한 선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논해야 한다는 취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게재72)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라면 설교, 기도, 전도, 심방 등 전통적인 기존의 목회 훈련을 받으면서 그것을 통해 자신들도 한 번쯤은 큰 교회를 이룰 꿈을 꾸었다는 것을 부인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목회 활동만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기는커녕 자기 가족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엄청난 정신적 압박과 함께 목회자의 자긍심은 물론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목회자들은 원치 않게 목회현장의 사회적 환경이 갑자기 변하거나 자신과 가족이 처한 형편의 변화로 본의 아니게 교회 밖 사람들의 생업(生業)의 현장에 뛰어들어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아픔을 토로한다. “전통적 목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목회자는 포화상태이고 임지는 쉽게 늘지 않고 한정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다 인도하신다. 통일 후 북한교회를 재건하러 보내면 된다’는 식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생각으로 신대원생 수를 무작정 늘려 받은 결과이다. 하지만 실은 신학대학들이 양적이고 외형적인 위상 제고 경쟁과 방만한 확대 경영을 한 것이 그 이면의 이유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에 전국의 작은교회들을 섬기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 가정들의 생존 문제가 오늘날처럼 된 것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에 총회 차원에서도 목회자의 이중직이라는 문제를 더 이상 피해갈 수만은 없었던가 보다.

  그런데 ‘목회자의 이중직’이라는 용어는 이 문제의 핵심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총회에서 정책을 연구하고 수립하는 차원에서는 그보다 더욱 직관적이게 ‘목회자 가정의 생계와 목회자 겸업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는 바울 사도의 모범 곧 ‘자비량(自備糧, Tent Maker) 목회’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바울의 자비량 선교마저 사시(斜視)로 보기도 한다. 그가 자비량 목회를 하게 된 것은 아덴에서의 선교 실패로 인해 낙담하여 도착한 고린도에서 어쩔 수 없이 내몰려 생계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바울 읽기이다. 바울은 고린도서보다 먼저 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미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파하였습니다.”(살전 2,9) 이처럼 바울의 자비량 사역은 그 자신의 분명한 신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중대한 문제를 단순히 “목회자와 그 가정의 생계를 해결하려는 방편”이라고만 접근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총회에서는 그런 식의 현실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소위 ‘이중직’의 현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목회자들의 소명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사도 바울의 목회적 선교적 신념을 따르는 목회자들이라는 자긍심을 고취해 줄 방안도 고심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사실은 소위 자립 대상교회를 시무하는 목회자들은 노회나 시찰회 안에서 직간접적인 부당함을 여러 부분으로 겪고 있다. 요즘은 교회 자립화 정책이라고 하지만 수년 전에는 ‘교역자 생활비 평준화 정책’이었고 그것이 결국 ‘선교적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단순히 ‘미자립 교회 목회자 가정의 생활비를 지원하는 관점’에서 실시된 것이었으니, 그 대상 목회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총회가 앞장선 것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자립’이라는 말도 우습다. 교역자 생활비를 자체 지급할 수 있으면 그 교회가 자립한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교역자 한 가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인가?

  더구나 그것은 좀 더 큰 교회로 옮겨갈 기회들을 스스로 마다하고 전국 곳곳에서 작은교회들을 지켜내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사역하는 많은 목회자를 무능한 목사로 내모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오히려 ‘전업 목회자’의 길을 스스로 버리고 능동적으로 교인들의 생활 현장에 들어가 보다 실질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한다는 ‘사회 선교적 차원’으로 여기고 제도를 신속히 바꾸어 주어야 하며, 선교 신학적인 방향에서 격려하고 지원해야 할 일이다. ‘전업 목회자’들은 사실 제 발로 들어와 적응한 ‘울타리 안의 양’을 치는 목회자라고 한다면, 두려움 없이 생활 현장에 뛰어든 ‘겸업 목회자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이라는 광야에 방목하시는 양들을 살피며 인도하는 목회자들이다. 해외 선교도 전업 목회자보다 일반 직업인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것이 많은 부분에서 더욱 효과적이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국내 목회만은 꼭 전업 목회자가 하여야 하는가?

  이에 관한 내용은 본 논문 후반부 4장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하여 논자는 특히 근대 중국 개신교의 ‘삼자운동’을 보다 깊이 헤아려볼 것을 제안한다. 갈릴리신학대학원 홍성현 원장은 이미 1992년, 중국교회의 독립과 삼자애국운동을 논하는 책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신학』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과거의 증거는 사람들을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울타리 밖에 있는 잃어버린 양들을 빨리 구원하여 울타리 안으로 이끌어오는 행위가 복음증거요 전도였다. 그런데 자전에서는 그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복음증거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의 근거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요 10,16)는 말씀에 있다. 물론 자전(自傳)은 이와 같은 양자의 구별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기독교는 더 이상 중국 전체와 구별된 서양의 한 분파가 되어서는 안 되며 어디까지나 중국의 일부이다. 그리고 중국 전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복음은 3백만 명의 것만 되어서는 안 되고 전체 10억 인민의 것이어야 한다. 자전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된 것이다.”73)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자신들만의 리그(울타리 안)’에 만족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인 대량모집에 기를 써 왔다. 하지만 운 좋게 그에 합세하지 못한 더 많은 영혼은 최근 ‘가나안 교인’74)으로 불리고 있으며, 누구도 그 삶의 현장을 찾아가 그들의 현실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애환과 아픔으로 인한 방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오히려 주님의 손이 필요한 그곳(울타리 밖)으로 선교적 목적을 위해 현장 직업훈련을 받은 ‘사회적 선교 목회자’들이 찾아가야 할 것이다. 국내는 목회와 전도, 해외는 선교라는 이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를 이제는 한국교회가 타의에 의해서라도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하느님께서 과연 오늘의 우리를 선교하시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우리의 민중신학이 고통받는 세상을 향해 나선 이후 많은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그런 길을 묵묵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에 자신의 대도시들을 건설하고는 모여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자만심에 취하여 있던 것과 정반대로, 갈릴리 농민들의 혹독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동고동락하였던 갈릴리 예수의 길을 따르는 목회였다. 이러한데도 소위 목회자 겸업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런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관점들조차 인지하지 못한 탁상공론을 반복한다면, 전업 목회만으로도 충분하여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울타리 안의 목회자들이 도리어 울타리 밖의 험난한 세상을 헤치고 있는 목회자들을 감히 예단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앞서 진술한 대로 논자도 지역사회 선교의 일환으로 노년층 농민들과 귀농인들의 자활을 모색하고 실천하면서 교회에 경제적인 누를 끼칠 수 없었고, 적잖이 늘어만 가는 채무를 '어쩔 수 없이 직장인'인 아내에게 더는 짐을 지울 수 없어서 ‘생활비 독립 5개년 계획’을 3년째 실천하고 있다. 교회 목회와 마을 일, 농사 및 협동조합 창업, 귀농 상담 등의 일을 지속하면서 조금이나마 경제적인 도움을 얻을 방안을 고심하던 중 인근 초등학교의 통학버스 운전원에 취업하였는데,75) 이를 통해서 대단히 중요한 몇 가지를 새삼 깨닫고 있다.

  그것은, 교회에서 지급하는 생활비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목회자들만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전업 목회자들도 자신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사는 그 ‘삶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는 일을 하나의 ‘영성 프로그램’으로 실시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욱 현장에 밀착된 설교 곧 화육(化肉)의 연장선에 있는 설교가 가능해진다는 점 외에, 교인들이 그 많은 예배에 참석하고 또 헌금하는 일이 얼마만큼 쉽지 않은 일인지 그래서 자신이 받는 생활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감함으로써 교회와 교인들에게 훨씬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총회에서 결의하여 교단 차원에서 이를 실시하거나 교역자회 자체의 결의로 실시하는 방안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기존 목회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작은교회운동이나 마을목회운동 그리고 일하는목회자운동 등은 목회자 자신들은 물론 기성 교인들의 의식 전환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의 시대적이고 선교적인 필요들을 충분히 이해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이런 새로운 교회 운동 또는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 새로운 목회 리더십을 주시하면서 한마음교회가 더 실질적으로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주변부’인 농촌에 있는 한마음교회는 더욱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또 성서는 그에 대한 어떤 지지와 영감을 주는가? 이에 다음 2장에서는 지금까지 한마음교회가 실제로 선교적 목회현장에 적용하여 교인들과 함께 실천해 볼 수 있다고 여기면서 한 발자국씩 접근하고 있는 ‘밥상 공동체 운동’을 살펴보겠다. 그것은 물적 인적 그리고 사회적 자본이 거의 전무한 전형적인 농촌 작은교회인 한마음교회가 지금 당장 실천해 갈 수 있는 성서적 대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밥상 공동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밥’과 ‘밥상’에 대한 우리 땅, 우리 언어, 우리 사람들의 인식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아직도 기독교의 언어들보다 지금껏 살아온 이 땅의 언어에 더 익숙한 대다수의 노인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을 위한 이해의 폭 또는 접촉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3장에서 성서가 말씀하는 밥과 밥상 그리고 밥상 공동체교회의 가능성 등을 찾아볼 것이다.



========= 각주

42) “마을을 교회 삼고, 주민을 교우 삼아!” 이는, 2년여의 준비 끝에 드디어 마을목회자로 나서게 된 2015년 새해를 맞고 있던 논자 자신의 ‘마을목회자 선언’이다.

43) 한국일, 『선교적 교회의 이론과 실제』 (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2016), 21-22.

44)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의 질문에 “우리는 군대(레기온)”라는 대답은 곧 거라사 지방에 실제로 주둔해 있던 거대 로마 군단(레기온)의 집단적 강제성과 폭력성이 폭로된 것을 가리킨다.

45) 홍정수 교수, 지난 2015년 6월 14일 한마음교회에 전한 주일 설교 중.

46) 민중신학연구소 엮음, 『민중은 메시아인가』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5), 52.

47) 앞의 책, 52.

48) 앞의 책, 52.

49) 최한구, 『마틴 부버의 생애와 사상 - 구약신앙과 신약신앙의 비교연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2), 27-28.

50) 권진관, 『민중신학 에세이』 (서울:도서출판 동연, 2012), 24.

51) 앞의 책, 27.

52) 농촌의 노인들은 스무 번 정도 이야기해야, 한두 번 이야기한 효과가 난다는 것을 논자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53) 권진관,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자』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33-35 참고.

54) 정장복 교수의 ‘서사 설교’에 대한 손쉬운 접근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면 된다. 최근에는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오고 있어서 우리의 현장과 비전을 이야기하느라 다소 지연되고 있다. 이 둘을 조화시킬 방안을 고심하는 설교문 쓰기를 하고 있다.
http://www.igoodnews.net/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50489 (2017.10.24. 접근)

55) 오필승 엮음, 『마을목회 신학과 실천』 (도서출판 큰빛, 2017), 17-18 참고.

56) 정대위, “한국인 상과 기독교 - 기독교는 한국인을 변화시켰는가?”, 전대련 노종호 엮음, 『한국 기독교 사회운동』 (서울:路출판, 1986), 78.

57) Charles De Montesquieu, 김미선 역, 『로마의 성공, 로마제국의 실패』 (서울:사이, 2013), 17.

58) Walter Wink, 한성수 역,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서울: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16 참고.

59) 앞의 책, 16.

60) 오필승, 앞의 책, 123.

61) J. C. Hoekendijk, 이계준 역, 『흩어지는 교회』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9), 30.

62) 앞의 책, 21.

63) 앞의 책, 21-23.

64) 다음 카페 ‘생명평화마당’ 자료실 참고. (http://cafe.daum.net/2010declaration/Cgtl/1 2017.11.16. 접근)

65) 황홍렬, “마을 만들기, 마을목회와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 오필승 엮음, 『마을목회 신학과 실천』 (도서출판 큰빛, 2017), 82.

66) 정경호, “마을목회 주제강의 - 마을목회 신학을 향하여, 생명의 밥상-평화의 밥상의 관점에서”, 「제 101-2차 총회 마을목회 세미나」 미간행 자료집, 7 참고.

67) 앞의 책, 7-8.

68) 이정용, 신재식 역, 『마지널리티 - 다문화 시대의 신학』 (서울:포이에마, 2014), 171-172.

69) 참고 - 홈페이지 : http://workingpastors.com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jonghyun.park.9634

70) 앞의 홈페이지, 게시물 참고.
http://workingpastors.com/일하는-목회자들을-열며/ (2017.11.16. 접근)

71) 교회를 위한 신학이야기, 「데오스 앤 로고스」, “목회자 이중직이 불법이라고? 생계부터 책임지고 말해야...”,
http://theosnlogos.tistory.com/335 (2017.11.16. 접근)

72) 「예장뉴스」, “전업 목회인가, 겸업 목회인가? - 선교적 관점에서 목회자 이중직을 논의해야”, 이 진 기자, 2014년 12월 12일 기사 참고.
http://www.pck-goo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58 (2017.11.16. 접근)

73) 홍성현, 『중국교회의 전기와 새로운 중국의 신학』 (서울:도서출판 한울, 1992), 82.

74) ‘가나안 교인’이란,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 나가’ 곧 “교회 나가지 않는 기독교인‘이라는 신조어이다.

75) 현재는 더 어려운 이웃과 새로 귀농한 젊은 귀농인 교인에게 양보하고, 통학버스 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 임시로 운행을 하는 일을 맡거나, 서산시의 물류 공장의 임시직 등에서 비정규 아르바이트로 지게차 운전, 화물차 운전 등을 틈틈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