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장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 선교 / 1.1 지역사회와 한마음교회 현황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LOCAL COMMUNITY MISSION OF
THE HANMAEUM CHURCH AND
THE SELF-SUPPORT BAPSANG COMMUNITY
제 1 장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 선교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 논문의 내용은 ‘지난 40여 년 동안 250여 명의 세례교인을 도시로 내보내고 현재 30여 명의 농촌교회로 겨우 남아 있는 한마음교회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선교적 과제들을 실천해 나가는 교회로서 지역사회 선교를 어떻게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한정된다. 어떤 새로운 이론이나 한국 농촌교회에 대한 무슨 거창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여력이 너무나 부족하고 우리가 밀착된 현실 상황은 지나치게 절박하다.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우리의 길을 우리의 힘으로 찾는 우리 자신의 길 찾기이다. 어디에도 빈곤한 이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신다.”
1.1. 지역사회와 한마음교회 현황
한마음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의 현황은 아래와 같다. 이는 충남 태안군 남면 소재지인 지역사회의 거주 인구 및 인구변동 상황과 개괄적인 경제적 상황 그리고 오늘날 농촌 마을 회복의 희망이라 할 수 있는 태안군 내 귀농 귀촌인들의 현황에 대한 자료이다. 어느 교회든 자신의 지역사회에 보내심을 받은 교회라면 그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지역사회의 사회적 요청에 대한 대응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하느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이 세상 속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우리의 귀는 언제나 지역사회에 열려 있어야 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대 사회적 솔루션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복음을 번역해내는 일이며 지역사회에 한마음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사회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공적(公的)이어야 하고 지역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1.1.1. 태안군 남면 소재지
2017년 현재 한마음교회의 지리적 위치는 우리나라 한반도 서해안에 있는 태안반도의 한복판,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달산2리 1188-1번지로 전형적인 농촌 지역의 면 소재지 내이다. ‘태안반도(半島)’는 태안군 남면과 안면도로 구성된 전형적인 반도 지형인데, 북쪽으로 태안군 태안읍에 잇대어 내륙과 연결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태안 해안국립공원인 서해, 남쪽으로는 원산도를 지나 보령시 대천항에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세계적인 최대의 갯벌이었던 천수만이 있다. 천수만은 1982년 정주영 씨와 박정희 정권의 무모한 방조제(일명 A, B 방조제) 물막이 공사로 드넓었던 천혜의 갯벌이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현대 농장’이 대대적인 벼농사를 하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방조제 공사로 생긴 인공 담수호는 서산시의 간월호와 서산시와 태안군 남면 경계에 부남호가 있는데 특히 부남호는 수질오염이 대단히 심각하여 이미 농업용수로 사용 부적격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이곳의 논을 현대 농장으로부터 구매하거나 임대한 남면 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여름이면 이 오염수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깔따구(midge)가 동풍을 타고, 거주 지역으로 날아와 큰 피해를 주고 있다.
2016년 현재 태안군 남면1)의 전체 인구는 4천 659명(남/2천 428명, 여/2천 231명), 외국인은 56명(남/29명, 여/27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1천 439명으로 전체 대비 30.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로써 2016년 현재 전국의 고령자 인구 비율이 13.5%이고 전국 면 단위의 비율이 28%인 점2)을 비교하면 여타 지역보다 고령자 비율이 상당히 높은 지역이며, 총 세대수는 2천 282세대에 세대 당 가족 수가 평균 2.04명으로 상당수의 독거 고령자가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음교회와 직접 관련이 있는 선교 지역은 남면 소재지로 달산 1, 2, 3리와 신장2리 등 4개 마을을 포함하고 있는데 면 소재지 단위의 상세 인구 상황의 통계는 행정기관에서 제공하지 않아 제대로 된 수치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면 소재지 내에 지난 7년 동안 40대 이하의 젊은 가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급격한 도시로의 인구이동 현상으로 지역 공동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다.
농촌 지역 면 소재지의 특성상, 반경 250m 내에 행정기관, 금융기관, 파출소, 의용 소방대, 우체국, 보건소, 중학교와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등 사회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필요한 현황 파악은 지역사회의 인적 자원의 현황과 변동 상황이 중요한데, 2017년 현재 남면중학교는 3개 학급에 전체 학생 수 37명으로 전년 대비 10명이 줄었고, 남면초등학교는 전년도에 이어 1개 학급이 줄어 전체 학생 수 44명이고 병설 유치원의 원아 수는 10명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면 소재지로부터 약 6Km 떨어진 남면 지역 내에 있는 삼성초등학교의 경우 5개 학급에 학생 수 38명, 병설 유치원 원아 수가 13명임을 미루어 추정해 보면 지난 수년 동안 오히려 농촌 지역의 인구가 상대적으로 집중되어 있다고 하는 면 소재지의 인구 공동화 현상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파악된다. 15년 전(2002년) 논자가 남면중학교에서 ‘지역주민 명예교사’로 위촉받아 방과 후 음악 밴드 동아리를 조직하고 지도할 당시, 남면초등학교와 중학교 전체 학생 수가 약 230여 명이었던 점을 비교하면, 면 소재지의 지역 공동화 현상 특히 젊은 가구의 이거 현상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지난 2016년에 개통된 면 소재지 우회도로 때문에 인구 소거(消去) 현상만이 아니라 명맥이나마 유지하던 면 소재지의 상권이 거의 사라졌고 아울러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침체와 소외감 등으로 사회 공동체성마저 상실된 채 방치되고 있다.
통계청의 공식 자료에는 면 단위의 자료가 없어 정확한 수치 파악은 불가능하지만, 전반적으로 농업 종사자들의 고령화와 함께 농촌 지역의 열악한 경제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3) 2015년 현재 전국 농가 수4)는 1백8만8천 518가구에 농민 인구는 2백5십6만9천 387명으로 한 농업 가구당 농업 종사자 수가 2.36 명이며, 특히 65세 이상의 노년층 농민 인구가 9십8만7천 201명으로 무려 38.4%나 되는데 이중 80세 이상의 농민이 1십8만1천 815명으로 전체 농민 인구의 18.4%를 차지하고 있다. 같은 해 전국 면 단위의 전업 농민 수는 1백4십3만4천 986명으로 전국 농민 인구의 55.8%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65세 이상 노년층 농민 인구가 5십9만9천 616명으로 41.8%나 되어 전국 평균보다 3.4%가 높다.
더구나 농업 이외의 소득이 전혀 없는 전업 농민들의 경제적 상황은 일반 상식적인 이해의 범위를 초월한다. 현재 전국 농가의 연평균 소득 통계를 보면, 2016년 현재 전국 농가의 1년 총소득이 3천7백1십9만7천 원이며 가구당 평균 부채는 2천6백7십3만 원이다. 순소득은 2천5백3십1만9천 원이지만 이중 순 농업소득은 1천6만8천 원에 불과하다. 충청남도의 경우는 이보다 더 낮은데 연평균 순소득이 2천3백4십9만5천 원이고 이중 농업수입은 연 9십2만1천 원에 불과한 데다 연평균 농업 경영비 지출은 무려 2천5백4십4만5천 원이나 되기 때문에 전업농가가 농업수입만으로는 농업 경영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2016년 현재 전국 농가의 월평균 생활비 통계 수치를 보면 농업 이외의 소득이 전혀 없는 전업 소농가의 경우 경제적으로 얼마나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전국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가구의 월평균 생활비는 1백3십7만2천 원, 그나마 면 단위 가구의 월 생활비는 1백2십8만3천 원이지만 그중 농가(農家)의 월 생활비는 1백2십6만4천 원인데, 60대 농가의 경우에는 9십6만7천 원이고 70대 이상 농가는 6십5만6천 원이 월평균 생활비로 조사되어 있다. 이는 고령의 전업 소농가가 절대다수인 농촌과 농촌교회의 경제적 상황이 어느 정도 열악한지 충분히 짐작되는 수치이고, 생활비 통계 조사일 경우 조사 대상자들은 자신들의 재정 상황을 실제 보다 높여 응답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보다 더욱 열악한 상황일 것임을 알 수 있다.
1.1.2. 태안군의 귀농 귀촌인
한마음교회가 지역사회 선교적 과제를 위하여 이상과 같은 주변 농촌사회의 사회적 상황과 함께 참고해야 하는 것은 지난 1970대 이후 멈출 줄 모르던 이농(離農) 현상에 반하여 6.25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의 대거 은퇴로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돌아오고 있는 귀농 귀촌인들의 현황이다. 논자는 한마음교회가 처해 있는 열악한 농촌 지역의 사회적 한계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첫 번째 시도로 2012년에 800여 평의 밭을 임대하여 교인들의 도움으로 농사를 지으며 이상과 같이 지역사회 주민들이 처해 있는 실질적인 상황 속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지난 2015년에는 1천 300여 평의 밭을 직접 임대하여 홀로 본격적인 농사를 지으면서 태안군 농업기술센터에서 해마다 시행하고 있는 농업인 대학에 등록하여 1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때 함께 하였던 40여 명의 귀농 귀촌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지속하면서 오늘날 농촌교회가 결코 간과해서 안 되는 또 하나의 선교적 목회현장이 곧 귀농 귀촌인들이라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들은 태안군 지역 내에 흩어져 정착하면서 전업(轉業) 또는 창업(創業)/창농(創農)을 위한 새로운 도전들로 모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2016년 현재 전국 귀농인 가구원 수는 2만 559명이며 그중 50세 이상의 장노년층 인구가 1만2천 120명으로 59%를 차지하고 있다. 이로 볼 때 귀농인의 대다수가 이미 30년 이상 기존의 직종에 종사하다 퇴직하고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계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태안군의 귀농 귀촌인 유입 현황은 전 년 도와 비교하면 무려 10배나 급증하기 시작한 2013년에 1천 889명(귀농 125명/나머지는 귀촌), 2014년 1천 976명 (귀농 165명), 2015년 2천 637명(귀농 197명)에 이어 2016년에는 2천 383명(귀농 147명)으로 꾸준히 새로운 귀농 귀촌인들이 유입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보다 상세한 조사, 예를 들면 이주 이후의 현황 또는 실질적인 농업 투자와 경영 규모 그리고 특히 3~5년 이후의 정착 현황 등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논자가 지난 3년 동안 뜻을 함께하는 귀농 귀촌인들과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된바 이들 대부분은 최소한 5천만 원 이상을 농업 생산 활동에 투자하기 쉽지 않은 생계형 일반인 귀농인들이었다.
그와 같은 투자 상한금액을 논자가 주관적으로 정한 이유는 이미 상기한 것처럼 전업농으로서 기본 생활비조차 순수 농업 종사로 얻을 수 없는 현실에서 자신의 노임(勞賃)과 생계형 채무의 상환을 감당하면서 기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소득을 얻기 위한 최소한의 영농 투자금으로 보기 때문이다. 농지 구매나 주택 마련에 소용되는 비용을 제외한 순수 영농을 위한 비용 곧 초기 창농(創農, 농업 창업) 자금의 최소규모로 보는 것이다. 「귀농귀촌 종합센터」의 ‘귀농귀촌 실태조사 결과’5)를 보면 현재 귀농 귀촌인들의 정착자금 규모로 5천만 원 이하가 전체 귀농 귀촌인 중 19%, 5천만~1억 원이 16.7%, 1~2억 원 22.4%, 2~3억 원 21.8%, 3~5억 원 13.5%, 5억 원 이상 5.9%로 응답했는데 이 또한 실제보다 심정적으로 확대하거나 기대심리로 응답하는 경향이 매우 짙은 응답률이다. 정착자금의 주요 사용처에 대한 질의에서 농지 구매 및 임대 40.3%, 주택 마련 34.5%, 영농시설 자재 구매 12.7%, 생활비 7%, 농작물 재배 및 가축 사육 3%, 기타 2.5%로 응답했는데, 사실 1억 원 이하의 정착자금 규모로 영농 귀농을 하려는 대다수의 귀농인일 경우 그 금액 전체가 순수 영농을 위한 투자금 규모이고 거주 환경은 열악한 농가나 임시 건물을 주로 사용한다.
귀농인 대부분이 단순히 ‘귀농(歸農)’이라는 용어에 현혹되어 농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생활이 해결될 듯 보이는 ‘귀농’이라는 말보다, 실제로 귀농은 전업(轉業)이며 창업(創業)이므로 ‘창업귀농(創業歸農)’ 또는 줄여서 ‘창농(創農)’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야 할 것이며, 정부 관련 기관들의 귀농인 정책과 교육 등도 처음부터 그런 개념으로 접근을 하도록 귀농 정책의 패러다임을 더 늦기 전에 바꾸어야 할 것이다. 지난 2014년의 통계청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체 귀농 가구가 1만 1천 144가구로 전 년에 비해 221가구(2.0%) 증가하였지만, 귀촌 가구는 3만 3천 442가구로 귀농 가구의 3배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촌진흥청에서 조사한 ‘귀농?귀촌인 정착 실태조사’에서는 귀농 귀촌인들이 농촌을 다시 찾는 이유로 조용한 전원생활을 위해서(31.4%), 도시 생활에 회의를 느껴서(24.8%), 은퇴 후 여가생활을 위해서(24.3%) 등 ‘귀촌(歸村)’으로 답한 응답자가 절대다수이지만 이들 대부분이 ‘귀농과 귀촌’의 개념을 혼동하여 ‘귀농’을 단순 ‘귀촌’ 정도로 너무 쉽게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고, 새로운 일자리 또는 농업?농촌 관련 사업을 위해서 ‘귀농(歸農)’을 하였다고 그나마 나름 준비된 귀농인들은 22.2%에 불과했다. 이러한데도 농업진흥청에서 운영하는 ‘농업 인력 포털’6)의 정식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귀농과 귀촌 구분 없이 커리큘럼이 짜여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정작 ‘귀농’ 곧 ‘창농’을 고려하고 있는 귀농인들을 위한 전문 교육은 놀라울 만큼 허술하다.
단적인 예로, 현재 정부에서 운영하는 「귀농 귀촌 종합센터」에서 e북으로 발간한 ‘귀농 귀촌 안내서’인 「귀농 첫걸음을 위한 귀농귀촌 가이드북 2017」7)을 보면 “귀농ㆍ귀촌이란?”이라는 단원에서 귀농과 귀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귀농 : 농업을 주업으로 자신의 주된 주거지를 농촌으로 옮기는 것, 사전적 의미 : 다른 일을 하던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려고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 ‘귀촌 : 농업을 주업으로 하지 않고 자신의 주된 주거지를 농촌으로 옮기는 것, 생활에 필요한 소득의 대부분을 농업 이외의 부분에서 충당하는 것, 사전적 의미 : 농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으로 되었고, 그뿐 아니라 다음 단원인 “귀농 귀촌 정착 가이드”에서는 귀농 귀촌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귀촌에만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1단계 : 귀농 관심, 2단계 : 정착지 물색, 3단계 : 농작물 선택, 4단계 : 농지와 주택 구입(임대), 5단계 : 농촌정착’. 이런 귀농 귀촌의 단계 설정은 사실 귀농ㆍ창농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식의 교육 과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1단계 : 일반 창업 교육 및 농업 창업 워크숍, 2단계 : 농업 관련 창업을 위한 기본 계획, 3단계 : 일반 경영 및 농업 경영 관련 교육 등. 이러다 보니 귀농이란 하나의 기업을 창업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농업 관련 일들로 생활하고자 하는 귀농인들은 치밀하지 못한 준비와 자세로 인해, 그나마 가지고 있는 농업이라는 생소한 분야의 창업 또는 전업 자금을 불과 수년 내에 소진하고 채무를 늘려가거나 도시로 되돌아가게 된다.
또한, 50세 이상의 장년 노년 귀농인들이 전체 귀농 귀촌 인구의 59%를 차지하는데 이런 경우 농촌 지역사회와 육체노동 그리고 특히 농업이라는 전혀 새로운 전문직종에 적응하고 배우는 기간이 최소 3년 이상씩 소요되고, 더구나 농 생산물의 지속적인 판로를 개발할 수 있으려면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이들이 농업인으로 정착하는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은 도전임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요즘 정부 시책에서는 ‘창농(創農)’이라는 말을 ‘청년 창농’에만 사용하고 있으니 은퇴 이후의 노년 생활대책이 거의 마련되어 있지 못한 대다수 귀농인을 위한 특별 대책이 절실한 실정이다. 농업의 특성상 1차 생산과 2차 가공 그리고 3차 판매까지 한 농가 또는 농업인 혼자 처리할 수 있어야 그나마 상대적으로 안정된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상식적인 이론으로 농업인들 특히 귀농인들에게 소위 6차 산업8)형 농업을 권장하지만, 사실 이것은 현장에서 실천할 수 없는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한 번이라도 체험농장에 도전해 본 귀농인들은 말하고 있다. 생산 또는 가공과 판매 서비스라는 각각 한 가지 분야에 전적으로 매달려도 성공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이 모두를 일반 농가에서 더구나 이제 농업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직종을 시작하는 귀농인들에게 장려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부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여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하여 교육도 하고 있지만, 최소한 기업 규모의 투자와 경영 자원을 갖지 못한 개인 귀농인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므로 ‘협업’의 중요성을 절감하도록 높아지는 ‘협동조합’에 대한 내용도 귀농인 기본교육 과정에 반드시 포함해야 할 분야이다.
더구나 전체 귀농인 가구의 평균 가족 수가 불과 1.7명이라는 통계 수치까지 고려하고, 대부분 장ㆍ노년인 남성 가장이 단독 귀농으로 결단코 녹녹지 않은 정신적 육체적인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실정을 고려한다면, 귀농인들의 상황은 해외 이민자들의 경우처럼 지역 교회들이 ‘위기 대응 선교’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국내의 농촌교회 목회자들의 경우 대부분 농업인인 기존 교인들의 농업 노동현장에 직접 참여하여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쌓아, 같은 실정에 놓인 귀농인들의 멘토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목회자는 거의 없다. 최근 들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P.C.K) 102회기 총회(총회장:최기학 목사)에서는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마을) 속으로”라는 주제를 채택하여 이제라도 지역사회의 생활과 생업의 현장에까지 참여하고 함께 하는 ‘선교적 목회론’으로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1.1.3. 한마음교회
한마음교회는 지난 1975년 9월 14일에 설립된 이후 42년 동안 약 2백 명 이상의 젊은 세례교인들을 도시 지역으로 내보냈고, 2001년 9월 10일 논자가 담임목사로 부임한 이래로도 42명의 세례교인의 도시 이주와 22명의 별세 교인 등의 자연감소만으로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이다. 그동안 10명의 교역자가 전임자로 시무하였는데 1대와 9대 교역자가 각각 5년, 6년씩 시무하였고 논자가 11대 교역자로 현재까지 17년째 교역(敎役)을 담당하고 있으므로 나머지 교역자들의 평균 시무 기간은 21개월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특히 농촌교회의 경우 이렇게 잦은 교역자의 이동은 교회의 성장에 상당한 장애 요소로 작용하는데, 농촌교회를 더 나은 목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를 찾아 이동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삼게 되는 목회자들의 현실적인 이유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목회자들의 잦은 이동의 원인은 농촌교회를 독점하고 있는 기성 교인 그룹이 교회의 체질을 변화시키려는 목회적 시도들과 충돌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전력을 다 쏟은 지난 17년 동안의 교역 활동으로 64명의 세례교인을 도시 이주 및 별세 등으로 내보낸 결과를 얻었는데, 이는 현재 한마음교회의 재적 교인 수보다 많은 수치이다. 우리 교단(P.C.K.)의 ‘조직교회 설립요건’이 세례교인 30명 이상인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2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내보낸 것이기도 하다. 현재의 한마음교회 교인 현황은 재적 57명에 평균 주일예배 출석 교인 30명 내외로, 70~80대 노년층이 70%나 되고 있다.
농촌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면 소재지’에 위치한 한마음교회는 지난 42년 동안 교인 수가 1백 명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현재 남면 소재지에는 개척한 지 20년 정도 된 성결회 교회가 거의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고, 이미 60년을 넘긴 감리회 교회도 그동안 70여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었으나 현재는 20여 명 정도가 남아 급격한 고령화로 퇴락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국의 면 소재지의 경우 대체로 1백여 명 내외의 교회들이 모이는 교회가 하나 정도씩은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이는 우리 태안군의 현황이기도 하다) 남면 소재지에 세워진 교회들이 상대적으로 대단히 열악한 지역적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단순한 교인 수로 교회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의 교인 수를 고려하는 이유는 교회가 세워진 지역사회에 어느 정도의 사회적 영향력 있는 하나의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노정(露呈) 시켜보는 데에는 타당한 근거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몸집만 무한 증식하는 데에 혈안이 된 가시적 성장제일주의에 함몰된 대형주의 교회들에 대한 비판과는 또 다른 현실적인 분석이다.
이상과 같은 한마음교회의 외적인 현황보다 중요한 것은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와의 관계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고백하듯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 몸)라면 이 땅의 모든 교회는 지금도 ‘세상을 선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자신의 지역사회에 대한 선교적 사명이 있고 그것을 위해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참여하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든 그 교회의 가치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느냐에 있지, 지역사회와는 거의 아무 상관이 없는 교인 수나 교회당의 크기 또는 재정 등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한마음교회는 거의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던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역사회와의 단절을 넘어 지역사회로부터 혹독한 냉소와 지탄을 줄곧 받으며 40여 년을 근근이 이어온 교회였다.
1.1.4. 한마음교회에서의 목회
논자가 본격적으로 ‘마을목회’에 도전하기 이전인 지난 2001년부터 2013년까지, 한마음교회에서 전력을 다했던 지역사회 선교의 과정은 오늘날 마을목회의 기반이 되었고 본 논문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그동안 ‘예장 마을 만들기 네트워크’9)에서 실시해 온 「마을목회 이야기 한마당」에서의 사례발표 내용을 토대로 서술한다. 농촌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환경10)에서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채 남아있는 농촌 지역교회의 부정적인 이런 모습들은, 물론 농촌교회만의 모습은 아니며 이처럼 심각하게 내부적 상황이 왜곡된 채 신음하고 있는 교회들이 사실은 대단히 많다는 현실 또한 우리가 함께 고민할 부분이다.
⑴ 부임 초기 4년의 고군분투 (2001~2005)
논자는 직전에 시무하던 대도시의 조직교회를 사임하고 2001년 9월 10일, 남면교회(한마음교회의 전 명칭)에 부임한 즉시, 그야말로 주변 지역사회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냉대를 당하고 지탄 받을 수 있는가를 여실히 알게 되어 상당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지역주민들은 교회를 두고 극심한 욕설과 비웃음으로 일관했고 새로 부임한 목사를 찾아와 격정적인 감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다. 이런 사태를 수십 년 동안 만들어낸 주범은 교회 개척 당시 교인들이라고 자부하는 장로, 권사, 은퇴 전도사 등으로 줄곧 전임 교역자들의 정상적인 목회 활동을 간섭하고 방해한 자들이었다. 이들은 문맹률이 매우 높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상습적인 문서 위조와 토지매매 사기, 고소 고발을 일삼으며 자신들은 ‘하느님의 비호를 받는 선민(選民)’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전도가 될 리 만무했고 젊은 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해 이들과 갈등하다가 결국 읍내 또는 도시의 교회로 옮겨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부임하자마자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면서 논자는 해외 오지(奧地)에서 매우 적대적인 미전도 종족을 만나 그들을 복음 전도자로서 상대해야 하는 ‘미전도 종족 선교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각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20대 후반 신학생 때부터 작은 농촌교회들을 단독으로 시무했던 경험들과 직전에 시무하던 대도시의 교회에서 마련해 준 전별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우선 바닥에서 물이 차올라와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창고를 혼자 대대적으로 수리한 다음 20~30명의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아 ‘상설 교회학교’ 곧 ‘지역아동센터’를 시작하였다. 당시 농촌에는 컴퓨터가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상설 공부방, 컴퓨터 교실, 악기 교실, 영어교실, 어린이 작은 도서관, 독서 교실, 탁구, 야구, 영화 상영, 충남-경기-서울권의 각종 박물관 탐방, 여의도 KBS 방송국, 국회 탐방 학습 등 할 수 있는 모든 현장학습 활동들로 만 4년 동안 1년 360일(명절 제외) 하루도 쉬지 않았다. 간식 먹이고 차량으로 귀가시킨 다음 청소하는 일이 매일 반복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조손 가정’ 아이들의 인성 교육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이 보람된 일이었다. 하지만 주일예배 시에 누차 알렸지만 단 한 명의 교인도 와 보는 이가 없었고 오히려 당시 시무장로는 ‘목사가 무슨 돈이 많아 저러는지 모른다’고 험담하여 교인이 아닌 마을 학부모들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탁구대, 난방기, 각종 악기, OHP와 스크린, 탁자들과 독서대, 책상, 10여 대의 중고 컴퓨터 등을 사들여 직접 설치하는 등 웬만한 것은 직접 만들어 사용하였는데도 이전 교회에서 받은 적잖은 전별금은 금세 바닥났다. 이대로 중지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에 몇몇 대도시 교회들에 처음으로 지원요청 편지를 보냈다. ‘우리 농촌 지역을 선교할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목회자 생활비가 아니라 지역사회 선교비와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두세 교회에서 응답이 왔고 이후 3년 동안, ‘총동원 전도 주일’ 이외 그동안 한국교회에 알려진 거의 모든 전도 활동에 진력했다. 노인 한글 교실, 의료선교, 미용 봉사, 경로잔치, 농촌 봉사활동과 마을 아이들을 위한 여름성경학교를 지원받았고, 자체 수련회를 하려고 찾아온 교회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 해수욕장 청소를 연중 실시하여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전환 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연 2회 이상 전도 물품과 전도 대원들을 지원받아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우리 교회에 분노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축호 전도와 대면 전도를 지속하였다. 한 사람의 교인이나마 늘려보겠다는 것은 분에 넘치는 목표였다. 어떻게 해서든 더는 지역사회의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지 않는 교회로 탈바꿈하는 일이 시급했다. 물론 우리 교인들은 아무도 선뜻 나서서 동참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웃 주민들 사이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와 달리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의 삶이 모두 드러나 있는 농촌 지역에서 한 사람의 교인으로 그런 주민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 4년을 넘기자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충청남도 초-중학 과정 통합 시범학교로 지정되었고, 우리가 하던 거의 모든 방과 후 특별활동 프로그램들을 시작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갑자기 없어졌다. 아울러 교단 총회에서 마침 실시한 “목회자 생활비 평준화 정책”으로 대도시 교회들의 지역사회 선교지원금도 모두 중단되었다. 그 교회들11)은 목회자의 생활비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지역사회를 위한 지역 선교비와 선교 활동을 지원한 것이었고, 우리 지역을 수년 동안 직접 방문하여 함께 하였는데 농도 교회 간의 그러한 유기적 선교 활동들까지 모두 중단된 일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중에는 대형교회이면서도 모임이 좀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던 남 선교회가 수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한 농촌 지역 선교 활동에 자극받아 크게 활성화된 일도 있어서 몹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태안군 지자체로부터 정식 인가를 얻으려고 문턱까지 추진한 ‘지역아동센터’를 모두 정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직전 임지에서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던 심장 부정맥이 다시 심해졌지만, 교인들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다. 지역사회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켜 교회와 교역자까지 원성을 듣게 만드는 일의 중심에 있던 시무 장로와 그를 따르는 교인들에게 목회자의 건강 악화는 오히려 좋은 분란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12)
⑵ 이후 6년간의 와신상담 (2006~2011)
그렇게 혼자 낙담하고 있을 즈음 교회학교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어느덧 마을 주민들이 ‘저 목사를 보고서라도 이제 그 교회 욕은 그만하자’는 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4년 동안 지역 선교에 진력한 결과가 그것이었다. 어느새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교육비가 갑자기 늘어났다.13) 아내가 초등학교 기간제 교사 일을 힘들게 시작하면서 숨통이 조금 트였지만, ‘교회 사례비 아니면 굶는 게 목사다’는 옛 어르신들 가르침대로만 살아온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적잖이 흔들렸고 이런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몇 번에 걸쳐 더 나은 생활과 목회를 할 만한 교회로 이임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도저히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일이 한 번씩 터졌다. 그럴수록 ‘이런 교회를 두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던 중 당시 시무장로였던 이가 인근 합동측 교회 땅 1천여 평을 그 교회 교인과 담합하여 목회자와 교인들을 속이고 분할 매도함으로써 결국 사기 및 사문서위조 상습범으로 가중처벌을 받아 수감 되었다. 지역사회에서 교회는 또 한 번 광풍에 휩싸였고 논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교회당 주변에 무섭게 자라는 잡초와 잡목 관리가 몹시 어렵던 차에 예초기를 하나 구매하여 교회당 주변과 진입로, 그리고 마을 도로변의 풀을 깎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예초기를 돌리면서 지나는 주민들에게는 아무 말 없이 목례만 하였다. 처음에는 핀잔을 주고 지나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음 해부터는 ‘더운 데 뭘 이렇게까지 하냐?’는 주민들이 늘어갔다.
부임 초부터 메주를 쑤어 된장을 생산하여 지속적인 자활의 기틀을 마련하자고 교인들을 설득했었는데, 사실 여기에 말하는 ‘자활(自活)’은 비단 물질적 자활만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지역사회를 향한 ‘선교적 채무 감’을 갖게만 된다면 자신의 마을을 치유하도록 돕는 선교적 교회로의 자립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논자의 신념 때문이었다. 수년 동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던 여전도회에서 도전해보겠다고 하였다. 첫해에 이틀 동안 가마솥을 걸어놓고 장작불을 지펴 교인들이 직접 수확한 콩을 삶아 메주 230여 개를 만들어 매달았다. 그렇게 시작한 메주, 된장, 간장 만들어 판매하기가 10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후 전국 여전도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독거노인 밑반찬 돕기’를 월 1회씩 4년 동안 지속하였다. 꼬박 이틀이 걸리는 일이었고 이런 지역사회 봉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교인은 논자와 아내 포함 5~6명에 불과하여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꾸준히 지속해온 이런 일들로 교회를 향한 지역사회의 부정적 관점이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교회당 현관과 옥외 간판에 “지역사회의 복이 되는 교회”라고 새겨 세워놓고 성서 전체 읽기와 강해를 계속했다. 소위 부흥회와 기도회로는 오히려 가식적 교인이 될 뿐, 나아가 목사가 설교로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선입견을 품고 있는 교인들이었기에 그야말로 ‘성서 전체’를 읽는 일이 필요했다. 이런 교회를 제대로 세워내는 길은 ‘목사가 이 마을의 주민으로서 일부 교인들보다 더 오래 사는 것뿐’이라고 다짐하는 와신상담이 6년을 넘기고 있었다. 어느새 부임한 지 11년이 되었고 대책 없이 퇴락해 가는 낡은 교회당과 사택과 같은 이 상황을 타개할 그 어떤 방책도 더는 찾아낼 수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지역사회를 선교하지 않고 자기 영달과 자기 위안만을 추구하는 교회는 처음부터 존재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반사회적 집단’일 터, 어떻게든 지역사회에 교회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나아가 지역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마침내 지역사회 속에 녹아들어 흔적 없이 ‘살 맛’을 내는 그런 소금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속절없는 압박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⑶ 마을목회 준비 3년 (2012~2014)
교인들을 여러 차례 설득하여 2012년부터 교회당 인근의 밭 800여 평을 임대하여 옥수수 농사와 들깨 농사를 시작했는데 대단히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반대하는 교인들의 반목보다도 지역주민들에게 어떻게 비칠지가 더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파종과 수확 철에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어보니 그동안 ‘농촌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농촌교회 목회’만 한 것이었다는 후회가 절실했다. 새로운 교인이 들어올 일이 거의 없어 결국 자연감소만으로도 이대로 가면 십수 년 내에 교회가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 늦기 전에 ‘농촌교회만’ 목회하는 목사가 아니라 교회가 위치한 ‘농촌 지역사회를 돕는’ 한 사람의 지역 선교사가 되지 않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부임 초, 2백여 명의 마을 경로잔치를 준비했지만, 교회를 몹시 배척하고 냉소하던 마을 주민들은 단 한 명만 참석하여 지역 선교를 지원했던 교회의 교인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한 일이 있었다.14) 그런데 이후 10년 만에 대도시의 한 교회로부터 의료ㆍ미용 봉사와 함께 2백여 명의 경로잔치를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해 보자는 연락이 왔다. 완곡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듬해 또다시 연락이 와서 상당한 심적 부담을 가진 채, 그 교회 사정에 따라 삼복더위가 극심했던 여름 어느 한 날을 잡아 준비하였다. 초청장을 정성껏 만들어 인근 마을의 이장과 반장들, 각 마을의 노인회 임원들과 면 소재지에 사는 분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간곡히 읍소하였다. 교회에서 모시는 것이지만 ‘교회’라는 말은 하지 말고 알려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런데 행사 당일 이른 아침,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각 마을 이장들이 ‘면사무소 뒤 장로교회에서 하는 경로잔치에 참여하라’고 반복하여 마을방송을 해주었다. 마침내 면 소재지 4개 마을에서 2백30여 명의 어르신들이 경로잔치와 미용-의료 봉사활동에 참석하였고 많은 칭송을 듣게 되었다. 이제는 그럴 정도로 교회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점이 크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또 한 번의 기회였다.
그해 가을, 면내 농협으로부터 교회당 인근에 경매에 나온 지 수년 된 3층 건물을 교회가 인수해 보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기존 교회당의 3백여 평에 ‘노인 공동 홈’과 ‘노인 주간 보호센터’ 등 소규모 노인 복지시설을 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계획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기대감이 없었지만 제직회에 토의 안건으로 알려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인수하기로 결정되었다. 경락, 명도, 리모델링 공사, 소유권의 유지재단 귀속 등등 수많은 일에 휘말렸다. 리모델링 공사는 몇 명의 목수들과 직접 작업하였다. 무사히 공사를 마무리하고 이사한 뒤 다시 한번 마을잔치로 입당식을 대신했다. 마을 주민들은 고맙게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진심으로 격려해 주었다. 그런데 교회당을 이전하고 나자 그동안 교회가 지역사회의 온갖 손가락질을 받게 하였던 이들이 갑자기 터무니없이 반발하고 나섰다. 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그들이 건축헌금 안 내려고 그런다’고 했다. 결국,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이탈하자 교인들과 이 기회에 교회 이름을 바꾸어 그동안의 좋지 못했던 역사를 모두 씻어내기로 하였다. 2014년 봄 노회의 허락으로 ‘남면교회’를 기꺼이 버리고 드디어 ‘한마음교회’를 시작하였다.
⑷ 마을목회 3년차 (2015~2017 현재)
2012년부터 거의 매 주일 교인들과 이야기해 오던 ‘협동조합 설립’을 서둘렀다. 마침내 2015년 8월 ‘한마음살림협동조합 법인’이 설립되었다. 2015년은 논자가 교인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 농토를 임대하여 농사짓는 한 사람의 소작 농민으로 거듭난 해이다. 약 1천 3백여 평의 밭을 직접 임대하여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농업 경영체 등록(농업인 등록)을 마쳤고 태안 농업기술센터의 농업 대학에 등록하였다. 이미 30여 년 동안 교회의 목회자로만 살아왔기에 물론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일종의 환골탈태는 ‘목회자에서 미전도 종족 자비량 선교사’로 살기 위한 전업(轉業) 또는 창업(創業) 수준의 변신이어야 했다. 현재도 그 실험과 도전은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생계형 지역 농가들과 농촌교회의 자활의 길 찾기’로 발전되고 있다.
주변 지역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 쇄신의 필요에서 시작하였던 지역사회 선교의 일들은 마침내 또 다른 우리 지역사회의 필요들에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농사 현장에서 은퇴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급격히 자연적 노쇠(老衰)한 상황을 겪으면서 적어도 20여 년씩은 더 살아야 하는 초고령화 시대의 노년 농민들과 귀농인들의 삶의 질에 관한 문제였다.
논자는 묻고 또 묻고 있다. 우리의 현장에 있는 극빈의 농촌 노년층은 ‘최소한 인간답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거의 모든 생산 활동이 중단된 80세 이후의 이분들이 인간적으로 이웃과 자녀들에게 존중을 받고 있는가? 한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잃지 않는 생활을 영위하게 할 수는 없는가? 자녀들이 주는 생활비로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며 적막한 빈집을 지키고 있는 일명 ‘자택 고려장(高麗葬) 생활’을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나아가 ‘노인병원 고려장’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다는 두려움을 떨치고 살게 할 수는 없는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초고령의 길고 지루한 삶이 아니라, ‘죽어도 죽는 게 아닌’(요 8,52; 11,25) 여전히 나름의 생산 활동과 이웃을 돕는 보람찬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는가? 목사의 심방과 자녀들의 전화와 방문만 고대하는 타율적인 삶에서 서로를 자발적으로 돌아보고 함께 치유하며 살아가는 길은 없는가? 연로한 시부모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는 요즘 며느리들이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냄새난다고 야단하는 버릇없는 손주들만을 탓할 일인가? 초고령기에도 나름의 창조적인 생활력을 발휘하여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는 건강한 어른으로 살게 해 보자는 것이다. 당연하고 너무나 마땅한 이런 일이 왜 이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일인가? 물질이나 인적인 가용자원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왜 이것이 안 되는가? 우리는 최소한 그 길을 찾아가는 일조차 할 수 없는 것인가?
한마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논자의 무모한 모든 도전은 이상과 같은 상식적인 질문들로부터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10대와 20대에 읽고 뇌리에 새겨진 이런 잠언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성자(聖者)는 가장 흠이 적은 자가 아니라, 가장 용기 있는 자이다.” -성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진리는 아픈 눈에 비치는 햇빛 같다. 누구의 감정도 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좋은 일을 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희랍의 디오게네스,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 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 -매헌 윤봉길, “어떤 사람들은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왜 그러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을 꿈에 그린다. 그리고 묻는다. ‘그것이 왜 안 되는가?’ 라고.”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이 박사학위 과정을 수업하는 중 읽게 된 다음과 같은 잠언도 있다. “이 세상에서 아직 검증할 수 없는 미래의 질서에 대한 투신(投身), 나는 그것이 신앙(곧 행위)이라고 생각한다.” -갈릴리신학대학원 홍정수 총장, 「홍정수 신학쪽지 - 에레모스 28호」.
이처럼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누구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한 농촌 지역의 공동화는 더욱 무섭게 그리고 더욱 비감(悲感)스럽게 다가올 것이 자명한 일이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한다고 하는 교회는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노력이나 도전도 없이 무력하게 그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사라져가는 농촌교회들을 끝내 자신들의 생활 수단으로 삼을 뿐인 무지한 목회자들과 함께 영영 잊히고 말 것이다. 이처럼 절박한 교회와 지역사회의 사회적 문제들을 더욱 깊이 파악하려고 시작한 농사일은 ‘농촌에서 교회의 길 찾기’ 그리고 ‘영세 소농가들의 자활의 길 찾기’, ‘자립해야 하는 청년 귀농인들의 자활의 길 찾기’ 등으로 발전하여, 결국은 ‘사회적기업’의 창업과 경영이라는 과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우선 ‘생계형 고령의 소농가’의 지속적인 자활이 가능할 방안 찾기 위해, 여러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농작물을 찾아 시험 재배를 시작했다.
일단 주관적 경험과 판단으로 최소한의 농작업을 위한 기초 투자비용 3천만 원 정도를, 농작업이 숙지 된다고 보는 3년의 기간 동안 가용할 수 있는 금액으로 기산(起算)했다. 최소한의 투자비용, 최대한 효율적인 노동으로 가능한 농작물이어야 하고, 그것이 연중 소비되어 적은 금액이라도 예측 가능한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것, 일반적인 농작물과 되도록 작업 시기가 겹치지 않을 것, 매년 다시 심지 않는 다년생 작물로 노동력의 최소화, 우리 지역에서 월동이 가능한 작물, 수확 시 구근 농작물처럼 무게가 무겁지 않을 것, 필요 이상의 시설 투자가 없어도 되는 것,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환경과 비용, 노동력 절감에 도움 되는 것, 작물이 세를 형성하여 제초 작업이 쉬운 것, 생산 후 1, 2차 가공과 보관을 할 수 있어 출하 시기를 조절할 수 있는 것, 소량 포장이 가능한 것, 우리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서 생산이 가능한 것 등의 기본적인 조건부를 만들었다.
이에 최대한 근접한 농작물로 찾아낸 것이 봄나물류였고 2015년 봄, ‘지리산 먹 고사리 구근’을 대량 구매하여 태안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임대한 농작업 관리기로 3명이 인부들과 함께 830평의 밭에 심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바로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거의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이 우리 지역에 찾아왔고, 새파란 어린싹들은 올라오는 즉시 모두 말라 죽어 5백여만 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그 외 500평의 밭에는 ‘부지깽이나물’과 함께 일단 감자와 들깨, 옥수수 농사를 하면서 추이를 살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녹색소비자연대 전국협의회’와 함께 ‘소비자가 주도하는 바른 먹을거리 운동’의 하나로 연중 약 1백여 명을 초청하여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의 ‘텃밭 농작물’을 농도 농산물 직거래로 연 1천여만 원어치의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연중 지속 가능한 제대로 된 체험학습농장이 아니면, 일과성으로 그치는 이런 행사로는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2016년에는 이웃 귀농인 동료와 협력하여 단수수와 들깨, 옥수수 농사를 지었고, 무 살충제, 무 제초제, 무 화학비료 농사를 고집하여 밭 임대비를 겨우 건졌다. 결국, 이런 일반적인 농사로는 자신의 품삯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2015년 태안 농업인대학 동기생들에게 ‘태안군 귀농귀촌인협의회’를 제안하여 결성하였다. 그 외에 2016년 초에는 동의하는 귀농인들과 ‘농업회사법인 솔향’을 설립하였고 2015년 8월에 한마음교회에서 설립한 ‘한마음살림협동조합’과 협력하여 ‘2016 전국 사회적기업인 육성 프로그램’에 지원, 전국 5백여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되어 ‘충남 사회경제 네트워크’에서 실시하는 교육과 현장 코칭에 임하게 되었다. 사실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은 처음부터 사회적협동조합 법인으로 법인 변경을 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 관련 분야는 지역사회를 선교하는 교회들이 반드시 주시해야 하고, 나아가 교단 총회에서 선교적 차원으로 더 전문적이며 정책적인 연구로 발전시켜야 하는 분야가 아닐 수 없다. ‘사회적기업인 육성 프로그램’은 1년 동안의 교육과 현장 코칭으로 계속되었는데, 아쉽게도 함께 하였던 귀농인 교인 한 분이 갑자기 별세하여 3명 이상의 팀을 이루어야만 하는 규정상 프로그램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제시하였던 주 사업은 ‘급격히 공동화되어가는 면 소재지 활성화를 위해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경영하는 상설 종합체험 학습장’이었다. 그런데 다른 육성팀들과는 매우 다른 농업 분야의 특성상 최소한 농작물의 파종 또는 이식이 이미 마무리되는 5월 이전에 지원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했지만, 육성 프로그램의 구조상 6월 말에야 지원금이 확정되어 지급되었고 임대농지라는 제한 때문에 3천5백만 원의 무상 지원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마을의 마을발전위원회15)에 지원금 통장을 내주면서 그동안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것으로 차제에 ‘마을기업’의 기틀을 놓아 보자고 제안하였다. 상당히 고무된 주민들과 함께 마을기업 교육 및 설명회를 위해 방문한 충청남도의 사회적 경제 관련 교육과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충남 사회경제 네트워크’의 마을기업 팀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장시간의 첫 번째 교육 및 설명회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참여했던 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큰 부담을 갖게 되어 시작도 하지 못하고 거액의 지원금을 그대로 반환하고 말았다. 인근 교회의 동료 목회자들에게도 지역사회 선교를 위해 함께 연합해 보자고 제안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협동조합은 물론 마을기업도 역시 구성원들의 의식과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절감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2017년 현재에도 ‘농촌교회가 앞장서는 생계형 소농가의 협동을 통한 자활의 길 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16년 9월에는 미래 식량자원의 블루 칩으로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는 ‘식용 곤충’ 중 ‘식용 귀뚜라미 사육’ 전문가를 만나게 되었다. 식용 곤충은 다른 가축 사육과 비교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 비용이 상대적으로 크게 절감되고 환경오염 방지 등에 대단히 유리한 분야로 선진국에서는 이미 상당한 미래 식량 산업의 하나로 활발히 육성하고 있는 분야16)이다. 오랜 고심 끝에 교회당 2층 식당 한쪽을 합판으로 막아 단열재를 붙이고 출입문을 달아 소규모 시험 사육장을 손수 만들었다. 그리고 6만여 마리의 식용 귀뚜라미 ‘쌍별이’ 시험 사육을 시작했다. 지난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까지 온습도에 매우 예민한 습성 등을 연구하면서 사육하느라 밭농사는 수수와 참깨, 들깨 농사로 마무리하였고, 3개월 전부터 교회당 지하에 10 평 정도의 공간을 막아 직접 사육장을 확대 설치하고 있다. 이제 곧 약 30만 마리의 식용 귀뚜라미가 사육될 예정인데 연 8회 정도의 수확이 가능하고 최소한의 가격으로 계산했을 때 연 900만 원 정도의 소득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 안정적인 소비처와 판로를 알아보고 있다. 투자비용은 약 1천만 원 정도의 대출금으로 충당하고 있는데 이 사육장을 영세 귀농인들과 청년 귀농인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성장한 청년들과 고령의 농민들이 자활하도록 돕는 식용 곤충사육 교육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그리고 총회 농어촌선교부에서는 신동리교회 오필승 목사가 시작한 ‘기독교 귀농인 상담소’를 정책사업 중 하나로 권장하고 있다. 한마음교회에서는 전국 네 번째로 「예장 귀농귀촌 상담소」를 태안 지소로 개소하였다. 개소식을 하는 날 많은 귀농인과 함께 태안군청 도시민유치팀과 태안군 농업기술센터 귀농담당팀이 참석하였기에, ‘기독교 귀농인들’이 자신이 귀농한 마을 인근의 교회에 정착하는 것이 귀농 정착의 성공률을 높이는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것임을 설명하였는데 현재도 상기한 두 귀농 관련 기관들과 지속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 귀농상담소와 식용 귀뚜라미 사육을 통해서 30대의 신혼 귀농인 부부가 한마음교회의 막내둥이로 등록하여 온 교인이 박수로 환영하였다. 농사일과 귀농인 활동을 통해 이런 일을 하는 목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기성 기독교인들도 여럿 만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지역의 주민들은 목회자가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을 상당히 환영하고 있으며,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는 대부분의 귀농인과 고무적인 관계가 되어 매우 친밀하고 유기적인 이웃으로써 도움과 협력을 주고받고 있다. 현재까지 7가정 10여 명의 새 교인이 등록하여 우리가 기대하고 또 희망하고 있는 ‘마을교회 생명 밥상 공동체’의 꿈을 위해 함께 하고 있다.
========= 각주
1) 이하 태안군 또는 남면 통계는 「2016년도 태안 통계연보」 참고. http://www.taean.go.kr/report/2016/2016.html (2017.10.10. 접근)
2) 「KOSIS (국가통계포털)」 검색 자료. http://kosis.kr/ 참고. (2017.10.10. 접근)
3) 이하의 통계자료는 「KOSIS (국가통계포털)」의 검색자료. http://kosis.kr/ 참고. (2017.10.10. 접근)
4) 정부의 농가(農家) 기준은 다음과 같다. ①조사기준 현재, 논이나 밭을 10a(300평)이상 직접 경영하는 농가 ②조사기준 현재, 농축산물 연간 판매금액 또는 사육하는 가축의 평가액이 120만 원 이상
5) 「귀농귀촌종합센터」, http://www.returnfarm.com/views/cms/rtf/m4/n46.jsp (2017.10.10. 접근)
6) 참고, 「농업인력포털」, http://www.agriedu.net/hrm/ 참고. (2017.10.10. 접근)
7) 전자책, 『귀농 첫 걸음을 위한 귀농귀촌 가이드 북 2017』 (세종: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연구원, 2017), 6-7. (참고 : 「귀농귀촌종합센터」 자료실에서 내려 받을 수 있다. http://www.returnfarm.com/ 참고. (2017.10.10. 접근)
8) 일반적으로 이와 같이 1차 산업(생산) + 2차 산업(가공) + 3차 산업(판매 및 서비스)을 망라해서 보다 높은 소득을 안정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개념으로 오늘날의 농업은 ‘6차 산업’이라고 부른다.
9) 신동리교회 오필승 목사와 부천 새롬교회 이원돈 목사가 공동 준비위원장으로 2015년 5월 19일부터 창립 준비모임을 가졌고, 2016년 12월 8일 전국에서 ‘지역사회 선교’ 또는 ‘마을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의 네트워크를 위해 「예장 마을만들기 네트워크(예마넷)」를 창립하여, 수차례에 걸쳐 “마을목회 이야기 한마당”을 개최하여 회원들의 마을목회 사례를 나누고 마을목회의 신학화를 노력해 오고 있다. 논자는 현재 예마넷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10) 농촌은 혈족사회, 사생활의 노출, 교류 없는 정체, 교역자의 잦은 이동 등의 특성으로 인하여 교회를 사사화(私事化 : privatization)하고 있는 개인 또는 교인 그룹이, 교회를 정상화하려는 교역자의 목회에 저항하거나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허다한 실정이다. 이는 농촌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11) 그 동안 우리 지역사회 선교에 도움을 주어 한마음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교회들은 서울 구의교회, 강북제일교회 보아스남선교회, 아름다운교회, 중동교회, 숭실고등학교 교직원 모임 등이다.
12) 10명의 전임 교역자들은 어이없는 폭행과 폭언을 당하거나, 또는 근거 없는 모함에 시달려 이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이를 교회 전체에 공개하거나 투쟁하지 않고 다른 교회로 이임해 버리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은 정들었던 목회자의 갑작스러운 이임에 대한 서운함을 그 목회자에게 돌리게 되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은 새로 부임하는 목회자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13) 지난 12년 전부터 목회자 생활비는 그대로 동결되어 있다. 결국, 열악한 농촌교회들은 이런 목회자 가정들의 고혈(膏血)로 존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쌓인 목회자들의 가난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물려지는데, 자기 자녀들의 장래까지 가불하여 교회에 쏟아부으며 가난한 농촌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있는 농촌 목회자들은, 주변에서는 물론 자신의 교인들에게조차 오히려 ‘무능한 목회자’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14) 그 일로 그 교회는 ‘이렇게 보람이 없는 경우는 처음 본다’며 결국 지역 선교 지원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기에 선교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었다.
15) 농촌지역 마을마다 대부분 조직되어 있는데 마을 이장, 반장들,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청년회장 등으로 구성되어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일을 모색하고 추진하는 모임이다.
16) ‘식용 곤충’ 관련 정보는 논자의 아래 블로그를 참고할 것. http://blog.naver.com/jooroogol/220903874900
'농민신학연구소 > [갈릴리 밥상 공동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2 장 우리의 밥, 밥상(床), 밥상 공동체 - 2.1. 2.2. 2.3. 2.4. 2.5. (0) | 2020.07.16 |
---|---|
제 1 장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 선교 - 1.3. 1.4. (0) | 2020.07.15 |
제 1 장 한마음교회와 지역사회 선교 - 1.2. (0) | 2020.07.14 |
서론, "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 선교와 자활 밥상 공동체 " (0) | 2020.07.03 |
초록,목차, "한마음교회의 지역사회선교와 자활 밥상공동체" (0) | 2020.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