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누가 읽기는 할까 싶은 이 칼럼을 읽어주는 몇몇 분의 반응을 보면 목회자와 교인들로 그 반응이 극명히 갈린다.
어떤 교인분은 고맙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 “목사님은 유난히 많은 읽을 겪었나 본데, 그만큼 상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온통 이야기가 부정적인 이야기들이네요.” 그런데 목회자인 경우는 다르다. “읽을 때마다 크게 공감합니다. 세상에서 보기 어려운 일들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겪는 것이, 나만 이런가 하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런 몇몇 목회자들이라도, 읽으며 공감도 하고 기막힌 일들을 혼자만 겪고 사는 게 아니라는 작은 위안이나마 얻으면 고맙겠다.
그래서 사실 20년 전부터 틈틈이 쓰고 있던 이 칼럼의 원제목은 <세상에 이런 일이! 교회에서?>이다. 교회 안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는, 기막히다 못해 기가 질리는 이런저런 일들은 정말이지 엄청나다. 나는 스물여섯의 젊은 신학생 전도사로 농촌 산골 마을의 교회에서 감히 목회 생활을 시작하여 면소재지, 읍내, 중소도시, 대도시 교회를 돌아온 지 벌써 35년째다. 참 유별난 일이 많기도 했던 이곳에서만도 20년이 다 되어 간다. 차마 이 칼럼에 옮겨 놓을 수 없는 정도의 일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묻고 또 묻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교회는 무엇으로 교회인 건가?’ ‘도대체 목사는 무엇으로 목사인 건가?’ ‘도대체 하느님 말씀이라는 성서는 왜 교회 안에 있는 건가?’ 등등. 그런데 특히 ‘교회 성장학’이라는 백화점-대형마트형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이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아는가? “교인들 많이 모아서 큰 교회 하려면, 그런 질문하지 말라. 자신을 위해서 성경 읽지 말고 기도하지 말라. 공연히 설교만 어렵고 심각해진다. 그런 교회는 교인이 안 모인다.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안 될 일도 다될 것같이 보여야 교인이 는다.” 믿거나 말거나. 이게 소위 교회 성장학이라고 하는 ‘교회 멸망학’의 주요 주장 중 하나다.
앞으로도 기억해주기 바란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칼럼의 본 제목은, ‘세상에 이런 일이? 교회에서!’다. 이곳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이전의 교회와 노회들에서 겪은 일들과 동료 목사들이 겪은 생생한 이야기들도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들은 지금도 그 이야기들, 온갖 회심 없는 적나라한 인격들이 난무하는 현장 이야기를 하면, 금방 얼굴과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변하곤 한다.
공교롭게도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소명과 목회자의 역할, 교회의 본질 등에 대해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이들이다. 그러니 위에서 내가 ‘교회 멸망학’이라고 한 ‘교회 성장학’이 얄밉도록 이 모든 세태와 시류를 잘도 읽어내고 있는 거다.
어쨌거나 이 어려운 농촌교회가 이처럼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 이름까지 바꾸어내며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聾)
'[갈릴리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52 (0) | 2020.09.19 |
---|---|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51 (0) | 2020.09.12 |
임계점에 다다른 농가소득 양극화 (0) | 2020.08.31 |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49 (0) | 2020.08.30 |
부총회장 후보 정견? 아이고, 1년 짜리가 그리 거창?! 웃겨~ 닥치고, 성서적 가치실현을 목표하는 정책들을 스스로 진보시켜가는 시스템을 좀 발전시켜! (0) | 2020.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