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어떤 교회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성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건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자신들의 주님께서 보내주신 종으로 신뢰하고 한마음이 되어 나아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요즘처럼 소위 ‘제왕적 목회자’(이건 사실 교인들이 원하고 만들어 낸다)의 부작용이 많은 때에 이런 말 하기 쉽지 않지만 이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로부터 그런 신뢰와 환영을 받고 부임하는 목회자는 이제 없다. 수십 년 동안 회심의 경험이라고는 거의 없이 ‘교회 중진’으로 적체되어, 본인만 모른 채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을 만난다.
이때 자신의 안위를 먼저 고려하는 목회자는 그들과 좋은 관계로 지내야 한다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들을 칭송하는 설교를 하며 잘 지내다가, 조금이라도 더 나은 교회로 이임한다. 그런데 교회 본연의 사명을 생각하는 목회자들은 그런 이들과 여러 모양의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을 추겨주지 못하고 회개와 회심 곧 변화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당연히 그들은 그런 설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목회자의 ‘약한 고리’를 찾아내 공격을 시작한다. ‘사모님이 어떻다’ ‘설교를 못 한다, 은혜가 없다’는 식의 프레임을 만든다. 목사가 자신의 설교와 삶에 무게를 느끼며 살아가는 모습은 권위적인 게 되고, 교인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솔선하는 것은 목사답지 못한 권위 없는 처신이 된다. 이때 목회자가 ‘나는 어차피 이 교회에 변화를 촉구하시는 주님의 견인차일 뿐’이라고 여기면 설교는 더 진지해진다.
내가 이곳에 부임해서 수많은 전도 활동, 지역사회 봉사, 어린이 청소년 보호센터 등에 전력을 다하다가 그만 중지하고 다만 강단에 엎드려 있을 즈음에, 사실은 그런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 오토바이를 몰고 온 당시 장로가 사택에 불쑥 들어와 말했다. “목사님은 다 좋은데, 교인들한테서 뭔 말이 나와유.” 나는 이 한 마디로 알아차렸다. ‘드디어 시작되었군!’
그래서 되물었다. “뭐라는데요?!” “다 좋은데, 사모님이 파마도 제대로 안 하고, 옷 입은 게 영~ 남의 집 식모 같다고 그래유.” “그러게, 딴 교회 사모님들처럼 맨날 화장하고 외출복 차려입고 살게, 좀 교회당 청소나 잡초 관리, 주일 점심 뒷정리, 교회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것 좀 본인들이 하면 좋지요. 장로님하고 권사님이 솔선하면 어떨까요?” 차마 ‘새 옷에 화장품 좀 사고 파마라도 자주 하게 생활비를 조정해 주면 좋겠지요’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많은 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를 쫓아내려고 이후 10년이 넘도록 온갖 시도를 다 해 왔다. 그중 여기에 꼭 남겨둘 이야기가 있다. 교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없자 그는 노회와 시찰회의 다른 교회 장로들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무슨 공식처럼 교회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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