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수호 태극기부대의 출발점 ]
영화 '태안(泰安)'을 보고 왔다
태안군립 작은 영화관
경영난으로 폐관할 거 같다던데
1950년 6.25 당시 전국에서
이승만 정부와 미군이
무려 1백만 명의 민간인을 계획적 의도적으로 대량 학살한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태안반도에서는 1천 3백여 명의 주민이 학살 당했다.
쉽게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마을 어르신들도 당시 일을 여쭈면 몸서리를 치며 더 이상은 말을 하지 않고 모두 입을 다무신다.
한 동네 사람들을 바닷가로 끌고가서 그냥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갯고랑 갯바위틈에다 쳐박아 놓았고, 장사 치르려고 아무도 나서지 못해 파리떼와 개들이 난리도 아니었다고 치를 떠신다.
일요일 저녁, 좌석 서른네 개, 작은 상영관인데 모두 여섯 명이 관람했다. 관리 직원이 안을 들여다 보도록 다들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 아름다운 태안의 풍광이 그리도 슬프고 처연하게 보이다니. 7-80대의 증언자들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에 몹시 고통스러워 하셨다.
그분들은 거의가 당시 열 몇 살의 아이들이었고 잡혀가 죽기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난 이들이었다. 가해자들은 마을 경찰들과 또 같은 마을 사람들이었는데, 가장 악랄했던 가해자들 중에는 증언자들을 가르친 국민학교 담임선생도 있었다.
태안군 곳곳에서 총소리와 참혹한 구타 소리, 죽창에 찔려 죽는 비명소리가 넘쳐났고, 남겨진 이들은 보복이 두려워 가족의 주검을 수습할 수도 없었고 소리내어 울지도 못했다.
보도연맹이 뭔지 무슨 이념이 뭔지 전혀 모르고 농사만 짓고 살던 마을 주민들은 몇몇 이웃사람들에 의해 무작위로 지목되었고 그렇게 짐승처럼 죽어 버려졌던 것이다.
태안군내 면사무소 창고가 마구잡이로 잡아온 주민들을 감금해 두는 장소였는데, 일 주일씩 열흘씩 피비린내와 신음소리로 그야말로 아비귀환이었다.
이 엄청난 일의 발단은 경찰들이 첫번째 학살 106명을 죽인 1950년 6월 27일에 일어난 학살이었다.
6.25전쟁 발발로 도망 치는 경찰들에게, 소위 보도연맹에 가입된 이들을 죽이고 철수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하달된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국군과 인민군이 진퇴를 거듭하면서 그때마다 반대쪽 진영에 미필적 밀고가 성행했고 억울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소위 빨갱이로 몰려 죽은 주민들은 1천 2백여 명, 반대로 우익으로 몰려 죽은 이들은 1백30여 명.
특히 1.4 후퇴 때 일어난 대규모 좌익 학살은 거의가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인 다음 몽둥이로 일일이 머리를 다시 내려쳐 확인 살해를 하는 잔혹무도한 것이었다.
일부 평범했던 이들의 공포스러운 이런 광기는 그렇게 해도 되도록 뒷배를 봐주며 부추긴 당시의 국가 공권력, 곧 이승만과 그 일당이 고의로 촉발시킨 것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승만 이래 오늘날까지 이런 집단 증오를 통해 권력과 자본을 독점 유지해 온 자들이 있고,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도 여전히 변한 게 없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5.18 광주시민 대량학살도 국가 공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과 그들의 군대가 일으켰고, 4.16 세월호 또한 국가 권력이 자국 국민을 살리는 일에 거의 방관 내지는 고의 수장시킨 이런 일은, 곳곳의 한심하도록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또 언제라도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피해 증언자 분들의 말씀에 가끔 나오는 '화해'라는 말이, 이토록 심각하고 무겁고 답답하고 숨막히게 하는 말이었던가.
소위 태극기 할아버지들의 거의 광기에 가까운 '자유수호 애국심'은, 자신들의 가해 행위에 대한 끔찍한 보복을 두려워하는 당시 가해자들과 연관 되었거나, 반대로 공포심 가득한 피해자 집안이거나. 그리고 자신들이나 자신들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행한 참람한 인면수심만도 못한 짓들을 끝끝내 정당화 해야 하니까.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일이 있었다.
태안군 8개 읍면 중에 태안반도의 가장 아래 고남면하고, 또 태안반도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남면이 빠진 무슨 이유가 혹시 있는 건지.
주민들께 여쭈어도 누구도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지만, 다른 자료에는 이곳 남면에도 엄청났었고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위 아랫집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경우도 있다던데.
안흥항 쪽에서는 유독 어느 한 성씨 집단이 같은 마을의 다른 성씨들을 그리도 무자비하게 씨를 말리려고 잔혹하게 죽였다던데.
이곳 남면에서는 증언을 해줄 사람들이 아직도 가해자들 앞에 나설 수 없는 두려움 속에 갖혀 있는 게 아닐지.
엄연히 이곳 주민들의 삶과 의식을 깊이 지배하고 있는 이 일을 제대로 낱낱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대략 짐작은 가는 바가 없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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