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주민을 교우 삼아...?”
“마을을 교회 삼고, 주민을 교우 삼아!” 내가 어느 자리에서 이러니까 어떤 교인이 묻는다. “아니, 마을을 회개시켜 구원해야지 어떻게 마을을 교회 삼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이요. 집사님.” 그분이 알듯 모를듯한 표정으로 갸웃거렸다.
옆에 앉아 듣고 있던 무종교님이 말을 거든다. “목사님은 당연히 마을 주민이 아니라 교회 교인들을 돌봐 주시는 거 아닌가요?” “그게요. 우리 기독교가 신앙하는 하느님은 세상을 자식처럼 여기고 사랑하시거든요.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도 자기 이웃한테 당연히 그래야 하지요.” “그리고요, 만약 제가 교회 일만 하는 목사였으면, 지난번 그 지원사업 계획서 같은 거 못써드렸을 텐데요.” 그러자 그분이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아하. 다른 목사님들은 다 자기 교인만 돌봐도 목사님은 그러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한창 귀농귀촌협의회를 조직하고 활동할 때 만난 불자님이 생각난다. 농사를 전혀 모르는 새 회원 댁에 가서 고구마 심는 것을 잠시 도와드렸다. 일을 마치고 나니 그제야 내가 목사인 걸 알았다며 그 회원의 부인이 물었다. “아이고, 목사님인 걸 몰랐네요. 그런데 왜 목사님이 이런 일을 하세요? 목사님이면 저 하늘 일을 하시는 거 아닌가요?” 하긴 불교에서 승려는 일반 신도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높은 신분이라 여기니까 이상했던 거다. “기독교는 본래 이게 하늘 일이거든요. 예수님도 땅에 내려와 사람으로서 하늘 일을 하셨지요.” 그분도 역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적어도 그렇게 마을을 교회로 삼고 또 마을 주민을 교우님들로 삼아 마을목회를 하려는 목회자와 교회라면,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시라. 우리의 마을목회는 거의 영원한 ‘짝사랑’일 거라는 사실을. 우리 하느님의 사랑도 그렇지 않던가. 아마 가장 일방적인 그래서 가장 고독한 사랑이 아닐까? 하느님이니 다행이지 우리 같으면 벌써 애 절어 죽거나, 열불 나서 진작에 관뒀을 거 같다. 아이고,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이라니!(딛 3,4)
수 년 전에 소천 되신 권사님은 80이 넘은 연세에도 이리저리 뛰는 서너 살짜리 손자 둘을 기르셨다. 우체국 앞을 지나려면 찻길로 마구 달려드는 녀석들을 지팡이 짚고 놀라 쫓아다니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야말로 거의 완벽한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마을을 교회 삼든 주민을 교우로 삼든 말든, 그건 우리의 안타까움이다. 마을은 아무 말이 없고 주민들은 늘 그 모습이다. 그러다가 무슨 흠이라도 보이면 다들 한 말씀씩 하신다. 그만큼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기대가 여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주민들의 바람은 사실 우리보다 훨씬 순수하고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처럼 좁디좁은 농촌 지역사회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모습도 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그게 마을을 교회 삼고 또 주민을 교우 삼아, 앞서신 우리 주 예수님을 따르는 선교의 시작점일 거 같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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