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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신학연구소/교회와 협동조합

협동조합과 귀농인 그리고 마을목회 - 사례 발표자료

by 농민만세 2016. 11. 29.


예마네 / 제 2회 마을목회 이야기 한마당 / 사례 발표자료


협동조합과 귀농인 그리고 마을목회

/ 이  진 목사(태안 한마음교회 담임목사)
(햇살공동체협동조합 대표)
(햇살가득체험농장 운영)


    “우리교회의 울타리는 마을 전체다!”“마을 교회처럼, 주민을 교우처럼!”매일 매시에 나는 거의 주문처럼 스스로에게 반복하며 살고 있다. 이것이 마을목회자로 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을목회에 본격 도전한지 만 5년차인 지금도 ‘왜 나는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나?’하는 자문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찾아와서 어느덧 늑대가 되어가는 양들에게 시달리는 일보다, 찾아오기는커녕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도 할 줄 모르고 사는 마을 속의 양떼를 찾아가 돌보는 일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에 보다 가까운 일일 거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먼저 목사 자신이 지역사회를 온몸으로 만나는 일에 망설이거나 두려워할 여유도 없는 한 사람의 선교사로서 그 지역사회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소명이 필요할 것이다.


    마을목회는 이처럼 교회당 밖에 있는 양들의 소리를 듣고 외면하지 못하는 일이며 교회당 밖의 마을을 돌보시는 주님의 심정에 동참하여 내 몰리는 일이다. 그래서 마을목회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하시며 또 다른 마을로 나아가신 주님을 기꺼이 솔선하는 실천으로써 따르는 일로, ‘세상을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 Dei)’의 교회가 되도록 기존 교회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내는 길고 긴 씨름이라고 본다.



1. 부임 초기 5년


    교회 울타리 안을 보살피는 전통적인 목회 활동만으로 우리교회가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는 교회였다면, 그래도 과연 나는 이렇게 교회 울타리 밖으로 나왔을까? ‘아예 마을 전체를 목회하자!’는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나는 그렇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얼마든지 교인들을 통하여 지역 선교를 감당하고는 있었겠지만 이렇게 직접 광야로 내몰려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마을목회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기존의 목회 방식의 한계점을 절감하게 하는 우리교회와 지역사회의 상황이다.


    돌이켜보면 물론 신학교 2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한창 고민 많은 청년기에 갑자기 산골에 거의 버려진 한 작은 농촌교회에 부임하였을 때부터 실은 ‘마을목회의 끼’가 다분했었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다. 하지만 그 이후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조직이 된 교회에 부임하면서부터는 울타리 안의 교인들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았고 더구나 함께 마을을 돌보고 마을 일들에 참여하자고 그들을 설득하기란 너무나 벅찬 것이 현실이었다.


    부임하고 보니 당시 우리교회는 그야말로 ‘교회가 지역사회와의 관계가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아예 대놓고 ‘도둑ㄴ의 교회’또는 ‘ㅆㅂ놈의 교회’라고 불렀고 그런 소리를 듣게 만드는 주범은 모두가 교회 개척 당시의 교인들로 수십 년 동안 주인 행세를 해온 장로, 권사, 은퇴 전도사 등이었다. 심지어 어떤 주민은 분에 못 이겨 새로 부임한 목사에게 부엌칼을 신문지에 말아가지고 찾아오기도 했었다.


    가슴 속에서 의분이 일었다. 이런 환경을 아래에서부터 바꾸어내야 한다는 과제가 한꺼번에 덮쳐왔다. 우선 품성과 언어가 막무가내인 마을 아이들을 모아 ‘상설 교회학교’를 시작했다. 공부방, 컴퓨터교실, 악기 배우기, 영어 교실, 영화 보기, 현장학습 등 할 수 있는 모든 특별 활동들을 만 4년 동안 1년 360일(명절 제외) 하루도 쉬지 않았다. 매일 하는 일이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누차 말했지만 단 한 명의 교인도 와 보는 이가 없었다.


    몇몇 도시의 교회들에 ‘우리 지역을 선교할 기회를 주겠다’는 편지를 썼다. 두 교회에서 기적처럼 응답이 왔고 이후 3년 동안, ‘총동원 전도주일’이외에 할 수 있는 모든 전도 활동에 진력했다. 노인 한글교실, 의료선교, 미용 봉사, 경로잔치, 농촌봉사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전도 물품과 전도대원을 지원받아 문전박대를 당하는 축호전도에 전념했다. 물론 교인들은 단 한 명도 와서 동참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5년 차로 접어들면서 인근 초-중학교에 변화가 생겼다. 충청남도 초-중학 과정 통합 시범학교가 되었고 우리가 수 년 간 달려왔던 거의 모든 특별 활동 프로그램들을 시작했다. 아울러 우리 교단 총회에서 실시한 “목회자 생활비 평준화 정책”으로 지역사회 선교지원금도 모두 중단되었다. 이후 우리교회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하던 지역 선교활동들까지 모두 중단되었고 다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혼자 남고 말았다.



"나는 우리 마을을 농사 짓는다!"는 심정으로~


2. 이후 5년 동안의 와신상담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하여 5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지역사회 어린이-청소년 선교사역’이 중단 되었다. 직전 임지에서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던 심장 부정맥이 또 다시 덜컥 찾아왔다. 근 2년 동안 누워서 잠들 수 없었을 정도였지만 교인들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하였다. 상태는 점점 나빠져서 공황장애 증상까지 겪고 있을 즈음 몇 명의 교회 아이들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 친구들이 모여 화투 치는데 어떤 엄마가 또 교회 욕을 막 했어요. 그런데 다른 엄마들이 ‘저 교회 목사를 보아서라도 이젠 교회 욕 그만 해라’고 했어요.”이것이 5년 동안 전력투구한 결과였다. 어느새 나의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갑자기 늘어나는 교육비가 만만치 않았다. 아내가 기간제 교사 일을 시작하여 겨우 숨통이 트였지만 부르심을 받은 목사로서의 정체성은 더욱 흔들렸고 낙담은 깊어졌다.


    마침 시무 장로였던 이가 인근 교회의 부지를 분할 매도하였고 결국은 사기 및 사문서 위조 상습범으로 가중처벌을 받아 수감되었다. 그 일로 장로는 자신을 모욕했다고 마을 주민 53명을 집단 고소하였다. 교회는 또 한 번 광풍에 휩싸였다.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을에서 만나는 주민들에게 그저 허리 굽혀 목례만 하면서 교회당 주변과 마을길을 쓸고 예초기로 풀 깎는 일만 계속했다. 그렇게 또 5년을 보내면서 지역사회를 품어 안지 못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거라고 교인들을 계속 설득했다.



마을목회를 이해하고 함께 해 주시는 교회 집사님들과~


3. 최근 5년 동안의 재기, 마을 속으로!


    1) 농부로 거듭나기


    어느 날 교인들이 ‘목사님이 그렇게도 하자고 하는 메주를 함께 쑤어 보겠다’고 했다. 내친 김에 힘든 일은 내가 다 할 테니 밭을 임대하여 공동농사도 짓자고 했다. 수익보다도 공동 작업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마을 안에서 교인으로서의 자신감이 고취되게 하는 일이 나로서는 목적하는 바였다. 처음 몇 년은 쉽지 않았다. 작은 일로도 마구 충돌이 일어났고 자칫 원망의 도화선이 되곤 했다.


    그런 일을 시작한 2012년부터 ‘협동조합’을 만들자고 설득하여 2015년 교인들과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을 설립, 된장 생산과 공동농사를 시작했다. 협동조합의 정신이 매우 기독교적이고 성서적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특히 마을과 함께 하는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만한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보였다. 하지만 교인들을 움직여서 지역사회를 선교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작은 농촌교회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목사로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아예 교인과 주민들의 생활 현장 곧 노동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자.”그리고 가까이에서 이미 마을목회를 혼자 해내고 있던 오필승 목사님의 많은 조언을 따라 우선 태안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가 ‘농업인 대학’에 등록하고, 한 사람의 신참 귀농인으로서 밭을 임대하여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시작했다. 이는 스스로에게 거의 환골탈퇴에 가깝도록 엄청난 일이었다.


    전통적인 평범한 목사로 살아 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거의 전업(轉業)에 가깝게 농부로 거듭나야만 했던 그 첫 해, 밭을 임대하고 작부(作付) 계획을 세우면서 나는 실로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근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전부 다시 세워야만 했다. “이제 나는 농부다, 나는 농사짓는 목사다.”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첫 해의 농사는 보기 좋게 완전히 실패했고 4백여만 원의 빚을 졌다.


    ‘목사가 농사짓다가 망했다’고 소문이 났다. 경로당에 한 번씩 방문하거나 거리에서 만나면 마을 어르신들과 겨우 인사 한 두 마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을주민들은 너도나도 왕초보 농부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려고 했다. 대화의 폭이 확 달라졌다. ‘목사가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초 고령기를 살아야 하는 어르신들을 잘 좀 모셔보려고 기를 쓰는 겁니다. 살기 좋은 우리 마을 만들기에 조금이나마 기여해 보려는 겁니다’라고 부지런히 전도(?)했다.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 발족을 위한 첫 모임 (우리 교회당 앞에서)


    2) 귀농인들 그리고 협동조합


    태안 농기센터를 찾아오는 귀농인들이 한 해 30여 명 정도이던 상황이 2015년부터는 갑자기 바뀌어 근 열 배나 늘어났다. 연중 계속되는 귀농인 및 창농인 교육에 참여하면서 많은 귀농인들을 만났고 공동의 관심사를 모아 서로 돕고 협업을 하는 협동조합을 구성해 보자고 설득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었고 이런 나를 이상히 여기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리어 ‘진짜 목회를 하는 거다’고 격려해 주었다.


    목사직을 내려놓고 서슴없이 만나고 대화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남자들이었고 대부분 기존의 교회에 환멸을 느껴서 귀농과 함께 교회도 졸업하려고 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생업의 현장에 똑같은 모습으로 목사가 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시작한 농부로서의 삶을 보다 전문화시키고 폭을 좁혀 주민들과 귀농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농장을 운영해야겠다고 방향을 정했다. 다행히 귀농인 중 나를 이해하는 네 명의 남자 교인들이 기적처럼 함께 하게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귀농 과정에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을 상담하고 서로 돕기 위하여 ‘태안군 귀농귀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보다 실질적인 농촌관련 사업들을 위하여 뜻이 맞는 이들과 ‘농업회사법인 솔향’을 설립했고, 체험농장을 운영하려는 귀농인들을 위해 우리교회의 ‘한마음살림협동조합’을 확대 개편하여 내어주고, 우리교회는 지난 많은 시행착오들을 토대로 ‘햇살공동체협동조합’을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설립, 보다 실질적으로 노인들의 생계와 서로 돌봄에 기여하기로 했다.


    지난 15년 동안 스물두 분이 소천 되셨고 마흔 한 명의 아이들을 세례 주어 도시로 내보냈다. 드디어 남은 교인 수 반 토막의 신화를 달성한 것이다. 이제는 최근 6~7년 동안 급격히 공동화 되고 있는 면소재지에서 더 이상 모을 아이들도 없고 어르신들은 해마다 두어 분씩 노환으로 주저앉으신다. 그 많던 바지락, 맛조개, 모시조개, 동죽... 해마다 몰려오는 도시사람들이 모두 긁어내 텅 비어버린 갯벌과 같은 마을이지만, 하나 둘 다시 돌아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귀농인들의 벅찬 도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보다 실제적인 경험들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새 교회당 입당식에 기꺼이 와 주신 2백여 명의 마을 어르신들


    적어도 몇 억 대의 투자금이 없이 오직 농사로서 한 줌의 수익이나마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나는 그렇기에 이와 같은 ‘소규모 농사’는 가히 목사가 마을 안에서 할 만한 사역 중 하나라고 본다. 엄연한 마을 ‘목회’인 이상 어떤 수익 사업이 아니라 공익에 기여하는 비영리사업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늘어가는 비용의 충당을 위해 인근 초등학교 등하교 스쿨버스 기사로 취업을 하여(지금은 오해하는 이들이 많아 일단 휴직 중), 우리 협동조합이 손익 분기점에 이르기까지 교회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소위 6차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적잖은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본의 농촌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배경, 무엇보다도 참여하는 농민들의 협동 의식이 없이는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체제의 불공정한 무한경쟁사회에서 주민들의 자발적 협동을 통하여 공공사회를 함께 이루어가는 일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교회의 시대적 사명 중 하나라고 본다. 협동조합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치유와 화해와 생명이라는 평화 운동에 매우 적절한 수단일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