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놀람과 경외/나의 골방

나옹선사(懶翁禪師) 토굴가(土窟歌)

by 농민만세 2024. 5. 25.

[나옹선사 토굴가]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춘風)이 건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중에 무슨 일이 세상(世上)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默默)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期限定)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求)하니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萬古)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 제불회상(靈축山諸佛會上) 처처에 모였거든

소림굴(小林窟) 조사가풍(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消息)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커든 세욕(世慾)이 있을소냐

욕정(欲情)이 담박(澹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中)에 법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듯 올라

무공저(無孔笛)를 빗겨 물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舞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령(無着嶺)에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나무영산회상불보살(南無靈山會上佛菩薩)!


나옹선사 懶翁禪師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 석옹화상(石翁和尙) 회상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24세 때(1344년)이다. 선사는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지도를 받고 자선사 처림(處林)의 법을 잇는다. 광활한 중국을 주유하고는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한다.

중략

나옹선사의 지도력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참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편력의 도정에서 중생을 만나고 제도했다.

하략

[네이버 지식백과] 나옹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