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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교다!"

설교의 역할? 설교는 무엇인가? 나의 설교는?

by 농민만세 2016. 7. 31.

설교의 역할? 설교는 무엇인가?


17년 전 시무하던 교회에서 동역하는 교육 전도사님에게 물었다. "내 설교. 가장 큰 약점이 뭐로 보이시나요?" 다행히 금방 대답이 돌아왔다. "결론부 그러니까 적용 부분이 늘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내가 원하던 대답이어서 '아, 설교 제대로 듣고 잘 파악하고 있구나'하고 칭찬해 줬었다.


어쩌면 이 말은 설교의 기승전결에서 결론부가 명료하지 않다는 말도 되고 또 그게 맞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의미로는 설교의 내용을 청중이 처한 현실 곧 실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을 하여야 할지를 보다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도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이에 대한 변명(?)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첫째, 성서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하기 때문이었다.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된 성서 구절이 말하는 내용에 한정해서 전달/운반해야 한다는 압박을 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 생활에서 바로 적용/실천해야 하는 내용을 말씀하는 성서 본문이 선택되기 전에야 그것을 어떻게 임의로 할 수 있냐는 일종의 강박이었다.


둘째, 그 설교를 통해 그 회중에게 말씀시는 분께 철저히 맡겨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교 사역에서 과연 어디까지 인간/설교자의 역할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나름 신학생 때부터 시작한 담임목회 사역으로 동료들보다 엄청나게 많은 설교를 해 왔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단순한 운반자'일 뿐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셋째, '회중이 들고 싶어하는 설교'를 따라가면 성서 본문을 제대로 그리고 그 전체를 전달할 수 없게 되고 정작 그들에게 실시간으로 말씀하시는 분의 입을 감히 막아버리는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압박이었다. 설교는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정작 회중이 만나야하는 분이 하시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특히 예수교의 설교인 이상 우리의 설교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예수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실 생활에 바로 필요한(?) 설교는 요즘 세상이 좋아져서 TV특강에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심리 전문가들이나 가정 상담 전문가들이 그런 이야기는 더 잘 해 준다. 그것은 그들의 전문분야이지 복음 설교자인 목사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겸손히 자신의 전문 분야에 충실하는 게 옳다는 강박이었다.


다섯째, 무엇보다도 "교회가 교회인 때는 '올바른 복음 설교'와 '올바른 성례전'이 행해지고 있을 때이다."는 종교 개혁자들의 선언적 선택에 절실히 잇대어 있었다.


여섯째, 그러므로 설교란 철저하게 '주님과 회중' 또는 '주님과 회중 개개인'의 관계를 말씀하는 성서 본문의 운반이고, 역시 실 생활에서의 건강한 삶은 성서가 줄곧 이야기하는 '주님과의 관계 회복 내지는 진전'으로부터 이끄시는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생각이었다.


이게 다, 교실에서 배운 덕이지만 무엇보다도 20대 후반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교회의 설교 사역을 혼자 전담해야 했던 과정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나는 지금도 이런 일종의 강박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후회하거나 거의 양보할 생각이 없다. 나는 짧은 한 생애를 절실히 살아가고 있는 나의 청중들의 귀중한 시간을, 나의 허접한 간섭과 월권(? 나는 자신의 설교로 무리한 적용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를 그렇게 생각한다)으로 허비하게 할 생각이 없다.


예전에 교인으로 등록은 하지 않고 매주일 만나던 한 60대 초반의 신사 분이 있었다. 오랜 동안 대학 교수 생활을 해온 분으로 보였지만 굳이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지 않았고 또 그것을 양해하여 달라고까지 했다. 4~5 개월 정도 매 주일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 나오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장기간 해외에 나가게 되어 무척 아쉽다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쉽게 아실만한 대학의 교수이고 대학에 오래 있다보니 대학원장을 지냈고, 이제는 스스로 타성에 젖어간다는 위기감을 느껴 수 년 간 유럽에 교환 교수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남긴 말은 지금도 내게는 여운으로 남아 있다.


"사실 저는 거의 평생 다니며 봉사하던 교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설교 말씀이 자꾸만 세상살이에 대해 내용으로 채워진다는 느낌이 들면서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목사님, 그런 건 외람되지만 저희가 전문가입니다. 책방에 가면 관련 서적들이 넘칩니다.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면 성숙하게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게 올바른 신자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그래서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을 주셨지 않았을까요?


교회는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목사님은 목사님만이 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고 또 있는 줄 압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 더구나 예수님 이야기,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어떻게 역사하고 우리를 독려하시는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저는 요 몇 달 동안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목사님은 평소에 듣지 못하던 성서 본문 전체를 이야기해 주셨으니까요. 목사님,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희는 교회에 와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듣고 배우고 싶은 겁니다.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이 않게 하는 설교...에 대해 앞으로도 고민해 주십시오........"


그분의 열강(!)은 근 한 시간이나 지속되었고 이후 농촌교회의 문제를 고민하며 탈출구를 혼자 찾아 헤메고 있을 때 어느 신앙 공동체의 교육에 참여하였고, 놀랍게도 그분을 매우 가까이 알고 지내는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분의 '설교'에 대한 열강은 계속되고 있다고 했고, 그때마다 부끄럽게도 '구의동'에서 만났던 어느 젊은 목사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는 분이었지만 제대로 된 딱 한 명의 청자가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설교란 무엇인가? 청중을 정말로 소중히 그리고 어린아이 아닌 성숙한 사람들로 대하기! 그들에게 말씀하려고 그들을 불러오신 분을 가로막지 않기! 나는 그분께서 운영하시는 택배사의 충실한 직원이 되기! 립싱크의 달인이 되기! 그러기에 성서의 본문에 철저히 매이기!!!!



지난 30여 년,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과 나누었던 설교와 성서 읽기들을 올리고 있다. 이로써 한 목회자요 신학도요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구도자가 어떤 길을 기독교 안에서 걷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설교'라고 보지 말고 '어떤 고민 많은 신학도의 성서읽기'로 보아 주기를 바란다. 이런 이유로 되도록이면 설교 제목에 표기한 '시리즈들을 순서대로 전체'를 읽기 바란다.


나는 여전히 멈출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외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영향으로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던 유년시절에 이미 나는 소위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회의 독실한 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길을 걷고 또 찾고 있다. 다행히 한 갈릴리 사람의 발자취를 줄곧 발굴하고 있다.


기독교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길, 기독교인들에 의해 신화화되지 않은 길, 기독교 목사라는 자들이 이용할 수도 없는 그 사람의 길을 말이다. 이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향한 준엄한 선언이다...



떨기나무 불꽃 앞에서 한 전달꾼이 벌벌 떨면서 거의 넋이 빠져 있다. 야훼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 각자의 골방에서 직접 만나 듣기를 바라신다. 그 일을 과연 그 누가 대행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래 그림의 불꽃 앞에 있는 모세는 오늘날 모든 신자 각자들이어야만 한다!!!


지거 쾨더(Sieger Ko"der)



(딤후 4:3-4)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음에 맞는 교사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