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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칼럼]

[한마음 칼럼] 나는 왜 농목으로 사는가 41

by 농민만세 2020. 6. 20.

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그 어르신의 말씀을 한참 듣고 보니 그렇게까지 역정을 내는 것이 너무 당연할 만큼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1천 평으로 알고 제값 다 치렀고 수년 뒤 사위가 그 밭을 다시 사면서 측량을 해 보니 8백 평이었다는 것. 그 바람에 아버지와 딸 사이에 큰 오해가 생겨 연락도 끊고 산다고 했다. 요즘 같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벌써 30여 년 전 이야기이고 더구나 이 지역 어른들의 문해력이 그만큼 낮은 상황이었다. 이런 시골의 경우 당시에는 마을 이장에게 인감도장까지 맡겨두는 일이 흔했던 상황이었음을 고려하고 이해해야 하는 사정이다.

발이 푹푹 빠지게 눈이 쌓인 밭에서 그 어르신은 마구마구 언성을 높였다. “내가 그놈을 만나려고 25년을 쫓아 댕겼슈. 여기 있다 해서 가보면 어느새 도망가고 저기 있다 해서 쫓아가면 벌써 오토바이 타고 사라져!” 한참 만에 겨우 고정하고 돌아서는 그 어르신에게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한마디 했다. “보통 땅을 사고팔면 다들 경계측량을 하게 마련인데, 그러지 않으셨나요?”

지금도 후회되는 이 한 마디가 그만, 겨우 꺼져가는 불에 기름 끼얹는 격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무심코 던진 그 말에 다시 돌아선 어르신은 더 큰 소리로 억울한 심사를 뱉어냈다. “그러게 우덜이 다 그놈 믿고 도장 맡겼다가 이런 사달이 난 거여! 이 근동 사람들, ‘하느님이 뽑은 장로를 못 믿냐’는 그놈 말 믿었다가 다 당한 거란 말여!” 그리고는 그대로 눈밭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결국 그 밭의 소유자는 그 어르신이 아니었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밭 주인을 찾아가서 간곡한 사정을 여러 번 말씀드리고 동의서를 받아 문제를 겨우 해결했다. 정말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이야기다. 크고 작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겠는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내가 왜 겪는지 감히 주님 앞에 엎드려 원망과 탄식을 내뱉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일이 15년 동안 계속되었으니 ‘차라리 내 손으로 아예 이 교회 문을 닫아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당 리모델링 공사를 아주 간단히 하고 사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택으로 사용해야 하는 3층의 거실 나무 바닥 한쪽이 심하게 썩어 있었고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너무나 부실하게 마무리된 외벽이었다. 건축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규제 완화를 남발했던 당시, 유행하던 외벽 시공법인 ‘드라이비트’였다. 이것은 스티로폼을 외벽에 붙이고 그 위에 시멘트를 뿌려 마무리하는 것으로 화재에 대단히 취약한 공법이었다. 교회와 사택의 이삿짐을 겨우 옮긴 후였지만, 많은 고심과 상의 끝에 드라이비트를 전부 뜯어내고, 독일에서 수입된 특수 방수천으로 외벽 전체를 두르고 방부목과 불연성 석고보드를 시공했다.

그럴 즈음, 일하는 목수들이 물었다. “대체 저 사람은 누군데 일하는 데 와서, 왜 자꾸 도끼눈을 떠요?” /계속 (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