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농목으로 사는 이유”
나는 왜 이런 이야기들을 쓰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도 어느 교회에서 여전히 똑같은 짓들을 하고 있기에 그에 대한 경계이며, 무엇보다도 ‘도대체 기독교의 죄 용서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서를 경전으로 삼은 기독교가 유교나 불교와 매우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어떤 ‘죄’와 그 ‘죄에서의 해방’에 대하여 유독 집중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이 유일신(唯一神)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들 종교에서는 모든 규범의 주인이 여럿이 아닌 하나의 신(神)이기 때문에, ‘그 신과의 상대적 관계’가 필연적으로 설정된다. 그런 이유로 그 신은 어떤 인격적 속성을 띄게 되고, 그 신의 의지와 그를 상대하는 인간의 의지가 서로 긴장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지와 상충하는 신의 의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하는 것이 그런 종교들의 주요기능이 되고 대체로 그 조절은 (당연하겠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굽히고 신의 의지를 따르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그들 유일신 종교에서 신의 의지는 인류 전체의 ‘공존’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개별적인 의지는 그것과 반목하는 속성이 있고 그렇기에 당연히 그런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에 굴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바로 이 당위성을 거스르는 모든 인간의 의지 곧 ‘모든 종류의 신적 규범의 위반들’이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 ‘죄’로 취급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성서에서 ‘죄’는 ‘과녁에 명중되지 않은 모든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는 그 죄의 해소(解消)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죄 씻음’이라고 하여 인간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신이 베풀어주는 은총/은혜로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이므로 그것의 완전한 해소/해지(解止)는 당연히 신의 편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신이 베풀어주는’ 죄의 해지 곧 죄 용서라는 ‘신의 행위’이므로 이것을 확증할 수 있는 어떤 물리적 장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종파들은 천주교의 ‘고해 성사’ ‘성찬 미사’, '사면부'처럼 각자 고유한 ‘의례(儀禮, ritual)’들을 발전시켰고, 이것의 부작용은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이런 어떤 종교적 의례 형식들을 거부해 온 개신교에서는, 성서가 말하는 ‘인격과 삶의 변화’가 아니라 ‘자신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어떤 종교적 느낌’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유독 개신교 안에서 이로 인한 온갖 부작용들이 폭발하듯 하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회는 어쩌면 ‘스스로 죄 용서받았다는 자기 확신’을 무기로 삼고, 더욱 반질거리고 단단한 ‘대리석 양심’을 갈고 닦아 가는 뻔뻔한 자들을 양산하고 고무시켜주는 ‘사회악의 소굴’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계속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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