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칼럼 : “교회 성장, 누가 방해하나”
새삼 돌이켜 보니 참 치열하게도 살았구나 싶다. 당연한 일 아닌가. 무슨 다른 인생의 목표였던 것도 아니고, 다만 ‘하느님 나라 운동’ 그러니까 ‘온 세상이 우리의 하늘 아바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 아바의 나라가 오시기를’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늘 아바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시기를’ 온 삶으로 갈망하는 기막힌, ‘저 세상’의 일인데 치열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다 보니 일반 교인들의 어떤 기대나 바람과는 너무나 다른 말을 하고 혁신하라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부대끼는 설교도 하고 또 온갖 지역사회 선교를 목표하는 일들을 엄청나게 벌였으니, 한편 내가 어지간히 저들을 들볶았던 거다 싶다. 하지만 대단한 건 그게 아니다. 그렇게 21년을 하루도 휴식이 없이 내달리며 끊임없이 촉구했지만 ‘쇠귀에 성경 읽기’! 정말이지 요지부동 끄떡없었다는 게 엄청난 거다.
(마 11:17)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물론 두어 분 듣기 시작하고 깨우치고 조금씩 줄곧 변화되고 성장한 이들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특히 농촌교회라는 건 하나의 공동사회 구성체이기에 옛 어른들은 ‘아궁이에 불 때기’로 비유했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난방을 하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살던 때가 있다. 처음에는 바짝 마른 짚이나 솔잎, 잔 솔가지를 불쏘시개로 삼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다. 미리 넣어놓은 장작에도 불이 붙어 화력이 오르면 연기도 거의 나지 않고 필요한 난방이나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농촌교회처럼 불쏘시개도 거의 없는 아궁이인데, 잔뜩 물을 머금은 썩은 장작이 하나라도 있으면 아예 불이 붙지도 않고 애써 살려봐야 꺼지고 만다는 거다.
주일학교 시절에 어머니 따라 다니던 고향 교회 목사님 설교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아마도 그때 우리 고향 교회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나는 보통의 교인들이 바라는 거 그러니까 하소연 다 들어주고 무조건 편들어 주고 위로하고 축복해 주기 같은 건 오히려 그들을 망치는 일이니, 도리어 하늘의 일들에 응할 만큼 어서 함께 성장하고 단련되자고 촉구했었다.
아동 청소년 공부방으로 하루도 쉴 날이 없을 때 가까이 사시는 노 권사님이 찾아와 탄식하셨다. “목산님, 참말로 속상혀유!” 또 며느리하고 다투셨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목산님 사몬님이 이렇게나 맨날 교회 부흥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교인들이 어떻게 전부 나 몰라라 한 대유?!”
한번 열 내시면 목청이 마구 높아지신다. “이게 남 일이래유? 목산님 사몬님이 누구 좋으라고 이 고생한 대유? 동네에서 다들 하는 말이유. 그 교인들 다 허깨비들이라구유. 그건 좋은 말이유. 지들 교횐데도 저러니 아주 못됐다고 씨부렁들이유. 경로당에서 지금 한바탕 하고 왔슈!” 뭐, 나도 직접 들은 얘기들이다. 교회 성장은 뭐가 방해하나? (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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